“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생명 중 작지 않은 것이 있을까.”
—진고로호 <미물일기>
별꽃, 큰봄까치꽃, 고들빼기꽃, 노랑선씀바귀, 귀룽나무, 박태기나무, 칠자화, 대왕참나무, 왜당귀, 노랑꽃창포, 병꽃나무, 좁쌀냉이, 소리쟁이, 죽단화, 종지나물, 우산나물, 비단이끼, 서리이끼, 꼬리이끼, 깃털이끼, 털깃털이끼, 멧비둘기, 해오라기, 솜깍지벌레, 총채벌레, 응애, 그리고 대망의 러브버그*…
올해 들어 반년간 이름과 모습을 익힌 존재들이에요. 늘 그 자리에 있었으나 그동안은 그저 배경으로만 인식해온 존재도 있고, 이름만 알던 존재도, 또 새롭게 만나게 존재도 있습니다. 이 중엔 영영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싶은 존재도 있지만, 대체로는 반가움과 기쁨이 컸습니다.
“새로 깔아 말끔한 보도블록 틈에서 솟아난 풀을 발견할 때, 예전에는 무서워하던 곤충을 가까이 바라볼 수 있게 되거나, 어제만 해도 들리지 않던 개개비의 울음소리를 듣고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면 이상하게도 손바닥이 빨갛게 파일 때까지 세게 움켜쥔 손에 힘이 풀렸습니다. 펼친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불었고 손끝에 막 돋아난 버드나무 이파리가 부드럽게 스쳤습니다.“
최근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으로 출간된 <미물일기>를 쓴 진고로호 작가는 이런 기분을 자주, 크게 만끽하는 사람 같아요. “그들을 발견할 때마다 그들도 나를 따뜻하게 응시해줬다.” 마치 환대받는 기분.
누구나 아름답다고 여기는 꽃에서부터 저자 스스로도 무섭다고 여긴 곤충까지, 그 존재에 경계도 없습니다. “꼼지락거리는 벌레의 안위를 염려하는 세심한 성정”을 지니고서 “미물에게 마음을 쓰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마음이 기울고 말아요.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존중하는 순간을 목도하는 일은 감격”스러운 데가 있으니까요. 책은 이런 순간들로 빼곡합니다.
<버섯 소녀>에서 제가 오래 머물렀던 페이지는 버섯 소녀가 곤충의 날개를 덮고 두 번의 밤을 나는 장면이었어요. 나는 곤충을 무서워하는데, 이 장면은 왜 이렇게 아름답게 느껴지지, 오래 생각해야 했거든요. 그 답을 이 책에서 발견하게 된 것 같아요.
저자는 천천히 움직이며 작은 것들 앞에서 종종 발걸음을 멈춥니다.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세계가 바로 옆에 있”다는 걸 아는 까닭이죠. 땅을 살펴 걸으며 지상으로 올라온 지렁이를 풀밭으로 옮겨주거나 매미 허물의 개수를 세며 여름을 나고, 씻던 상추에서 나온 민달팽이를 돌보고, 홀로 남은 사무실에서 만난 파리에게 인사를 건네요. 작고 꿈틀대고 낯설고 때로는 징그럽고 간혹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도 하는 각기 다른 그들 안에 한 생이 있으며, 그들 모두 자신의 시간을 살고 제 몫의 삶을 다하는 존재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저자는 그 존재들에게 정확한 이름을 불러주려 애씁니다. 새구나 매미구나 뭉뚱그리지 않고 새소리, 매미소리가 들리면 고개를 들고 나뭇잎 사이를 살피고 그들의 모습을 세세히 관찰하고 탐색합니다. 개개비, 참새, 곤줄박이, 붉은머리오목눈이, 큰부리까마귀, 떼까마귀, 오색딱따구리, 청딱따구리, 쇠딱따구리, 털매미, 쓰름매미, 참매미, 말매미, 애매미, 풀매미, 유지매미, 늦털매미… 맙소사. 그래요. 그는 참매미와 말매미의 울음소리를 구분하고 그 사이 낯선 소리를 감지하며 후에 그것이 유지매미의 소리라는 것까지 알게 되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초능력을 지닌 히어로인가 싶어지고, 호기심의 더듬이와 선한 마음의 날개가 달렸을 것 같아요. ‘대단하다’ 말이 절로 나오고요.
실제로 지렁이를 풀숲으로 옮겨주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께 “정말 대단한 사람이네”라는 말을 듣게 된 에피소드가 등장하기도 하는데요. 저자는 반대로 지렁이를 생각하며 “대단해!” 감탄하고, 자신에게 순수한 경탄을 표해준 할머니에 대해서도 “꾸밈없이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 어린 호기심을 전하는 점”이 대단하다고 씁니다.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존재 중 딱따구리도 빼놓을 수 없겠어요.
“딱따구리의 완벽한 몰입을 구경하는 나 또한 놀랍도록 집중했다. 오래 찾아 헤매던 순간이었다. … 나무를 두드리며 살아가도록 태어났지만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모습을 직접 보면 그런 딱따구리에게도 나무에 구멍을 내는 일이 별거 아닌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두 번 부리 끝을 나무 표면에 부딪쳐서는 구멍을 낼 수 없다. 발톱으로 한자리에 몸을 단단히 고정하고 한 점을 향해 끊임없이 부리를 부딪쳐야 한다. 전력을 다해.”
책은 모든 존재가 미물이라는 점을 되새기며 문을 열고는 그 세계에 이렇듯 “전력을 다해” 살아가는 “대단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펼쳐놓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좇다 보면, 이 존재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는 저자의 말에 주파수를 맞추게 되고 이내 함께 존경을 표하게 되어요.(일주일간 제게 놀라운 경험을 선사해준 러브버그들에게도요. 환대해,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이 구씨에게 말한 것처럼, 그렇게.)
“어디에 계시든 작은 것들을, 나 자신을, 그리고 살아 있는 생명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사람들의 미소를 찾아내시길! 다정한 발견이 우리의 계절을 가득 채우길.”
매미가 울기 시작합니다. 저는 아직 정확한 이름은 모르지만 전처럼 귀를 막지 않고 쫑긋 열어두려 해요. 대단한 미물들과 미물로서 진지하게 마주할 순간들이, 그들의 환대로 알게 될 구체적인 이름들이 남은 해의 절반을 가득 채워주길.
*오후의 소묘가 자리한 서울 은평구에 창궐한 러브버그 관련 기사:
“벌레 얘기로 시작했지만 삶과 사랑, 인간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기도 했다. 기후위기에 대한 걱정은 그 어느 때보다 자주 등장했다. 벌레도 사랑을 하네요. 그런데 저게 사랑일까요. … 벌레공포증이 있는 나는 당장 눈앞에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저 검은 날개 달린 벌레를 가장 빠른 속도로 박멸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이 각자 대응하는 방식과 새로운 질문과 논의를 이어가는 걸 읽으면서 생각의 방향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밤새 읽은 어떤 게시물에서도 정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새로운 질문과 구체적인 경험으로 이루어진 정보들이 벌레의 정체와 유래, 박멸 방법에만 초점이 맞춰졌던 관심을 다른 차원으로 돌려주었다. 이번에도 역시 아는 것이 힘이 되었다. 그리고 내 욕망에 대한 답을 듣는 것만을 앎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혐오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풍부한 질문과 구체적인 경험들로 이루어진 앎이라는 점 역시.”—권김현영, ‘사랑벌레에 놀랐던 밤, ‘랜선 이웃’이 가르쳐준 이것
**함께 보면 좋을 그림책:
<미물일기>를 읽으며 작은 존재를 크게 그려내 우리를 압도시키는 미로코 마치코의 <깜깜한 어둠 속에서>를 떠올렸어요. 까만 점 하나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생명(력)이란 무엇인지, 나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환대한다는 건 어떤 모양인지.
<버섯 소녀>는 두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아주실 테죠. 작은 것들을 살피는 마음을.
그리고 미물의 세계가 놀랍도록 세세히 구현된 <곰들의 정원>(8월 초 출간 예정)도 리스트에 올려봅니다. 그림책만큼 미물을 환대하는 장르가 또 어디 있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