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식 책방]과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두 번째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오늘은 두 편의 연재를 띄웁니다. 주제도 내용도 전혀 다른 글이지만 기다리는 마음과 갈망하는 마음 사이 춤과 노래, 그리고 책이 있네요. ‘비를 맞으며 웨이브를 추는 노란 우비의 아이’처럼 놀랍고도 낯선 ‘타자를 품을 가능성’을 안겨주는 편지이기를 바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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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한샘
출근하기 싫은 날이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이 아닌, 책이라는 물건을 파는 삶이 나를 온통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아침이 가끔 찾아온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곳으로 들어가 내 정신이 수용할 수 있는 양을 넘어선 책들을 상대하는 매일의 삶이 갑자기 버겁게 느껴지는 날. 그런 날이면 책방을 하겠다는 사람은 말리고 싶다던 수많은 책방 선배님들의 글과 말이 손에 손을 잡고 나를 감싸고 돌며 강강술래를 한다. 정신이 혼미해지도록 빙글빙글 도는 그 원을 간신히 끊고 기어 나와 나의 작고 노란 책방의 문을 여는 일이 고단하게 느껴지는, 그런 날이 있다.
책방으로 가는 길 신호 대기 중에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를 보았다. 노란색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고 고인 물에 발을 넣었다 뺐다 하기에 눈길이 갔다. 우산은 펴지 않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놀고 있기에 그림책에서 방금 튀어나온 모습 같네 하며 바라보는데 아이가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을 춤이라고 해도 될까. 가만히 보자니 아, 저것은 웨이브다. 보고 있던 나는 너무 당황했는데 아이도, 아이의 가방을 들고 있는 보호자도 평온해 보였다.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음악도 없는 그 거리에서 무아지경으로 꿀렁꿀렁 몸을 흔드는 노란 우비의 아이와, 고요히 바라보는 보호자. 그 광경이 놀라운 건 나뿐인 듯했다. 신호가 바뀌고 비보호 좌회전으로 책방 거리에 들어설 때까지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메모장에 “놀라운 아이를 보았다. 노란 우비를 입고 긴 우산을 손에 든 채 비를 맞으며 웨이브를 추고 있었다”라고 적었다.
잘 우러난 차를 투명한 주전자에 담아 워머 위에 올려두며 손님이 너무 많이 와서 내어드릴 차가 떨어지면 어쩌지, 이런 날씨에는 커피보다는 차가 좋은데 하는 생각을 한다. 차가 부족할 만큼 손님이 밀려드는 상상을 하면 너무 좋고, 좋은 만큼 피곤해진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자동으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나의 인사에 들어오는 사람의 반 정도가 대답을 한다. (눈을 마주치는 것도 대답으로 친다) 나머지는 마치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는 듯 내 목소리의 방향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들어오는데, 그저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란 걸 몰랐을 때에는 내 목소리가 작아 못 들은 건가 싶어 소리치듯 인사를 건네기도 했었다.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책을 사지 않는다. 책을 사지 않는 사람들이 서가를 둘러보는 모습은 참 닮아 있다. 책을 들어서 살펴보지 않고, 선 자리에서 내려다본다. 그중에서도 팔짱을 끼고 서가를 도는 사람들은 진짜다. 진짜로 책을 안 살 작정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책을 안 사는 사람들이 또 있는데 바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가를 돌아보는 사람들이다. 한번 주머니에 들어간 손은 책방 문을 나설 때에야 다시 나온다. 책을 집어 들기조차 싫어하는 사람들이 책을 살 리 없다는 건 당연해 보인다.
그런 방문이 계속되면 나는 슬퍼진다. 사람들이 책을 사지 않아서, 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더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가 그 안에 들어 있다. 책을 사지 않고 나갔을 뿐인데 내가 골라놓은 책이 외면받는 기분이 든다. 선택받지 못한 책들은 외로워 보이기만 한다. 책방의 하루는 그저 낭만만 가득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 밖에서 보이던 그 노란 책방의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나는 영영 모를 텐데도 내 마음대로 따뜻한 공간이라 생각해 버린 건 아니었을까. 끊지 못한 생각들이 이어지면 다시 말들이 주위를 돌기 시작한다.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책 좋아하면 책방 하는 거 아니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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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파는 일은 결국 다른 세계에서 오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책방으로 출근하는 것은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기로 작정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도 여전히 어색한 일이어서 나는 이 일을 오래 하고 싶기도 하고, 당장 그만두고 싶기도 하다. 오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실망하고, 왔으나 책을 사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슬플 때면 음악도 없이 꿀렁꿀렁 몸을 움직이던 아이를 생각한다. 우산이 있지만 우비에 달린 모자 위로 떨어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온몸을 둥글게 둥글게 만들던 아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그 움직임. 내게도 그런 마음이 필요하다고, 몸 대신 마음을 둥글게 둥글게 만들어본다.
글 쓰는 데 고통을 받던 버지니아 울프는 좋은 날 다음은 나쁜 날, 그렇게 지나간다고 했다.* 그리하여 나도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있지만 계속 책방 문을 연다. 지나가는 하루하루 안에서 타인의 글을 팔기 위해 나의 글을 쓴다. 책이 사람을 불러오리라는 믿음으로 쓴다. 차를 데우던 초가 꺼지기 전에 문이 열리고 얼굴이 들어온다. 일주일에 세 번은 보는 얼굴. 어디에 원하는 책이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발걸음은 새로 들어온 책을 정리하기 전에 두는 비밀 장소로 향하고, 나는 그 발걸음을 안도의 눈으로 뒤쫓는다. 새로 들어온 책등을 정성스럽게 훑는 손길을 보며 오늘의 첫 손님이 마지막 손님이 되더라도 책이 연결해 주는 마음을 믿어보고 싶어진다. 오늘도 책방 문을 열었으므로 오늘의 손님, 미지의 세계로 들어와 단골이 되어준 손님과 마주한다.
*버지니아 울프 <울프 일기> 1936년 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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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31일 가정식 책방 ‘리브레리아Q’를 열었다. 이탈리아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지금은 책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다. 딸과 나눈 책 편지 《세상의 질문 앞에 우리는 마주 앉아》를 썼고, 그림책 《구름의 나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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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유진
“제가 원하는 것은 생명이 유동하는 것, 매일매일 변하는 것, 어떤 새로운 것, 습관적인 것인데! 미칠 듯한 순간, 세계와 자아가 합일되는 느낌을 주는 찰나, 충만한 가득 찬 순간 등 손에 영원히 안 잡히는 것들이 나의 갈망의 대상입니다.”*
전혜린의 편지다. 엄마의 책에도 내 책에도 이 구절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우리는 각자의 장소에서 전혜린을 읽었다. 엄마는 건넌방 이불 속에서, 나는 파리의 다락방에서.
엄마가 전혜린의 책,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완독한 것은 1985년 3월 7일이다. 엄마는 다 읽은 책에 일기처럼 날짜를 기록해 두는 습관이 있었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 남이 대신 써준 일기에 마침표를 찍는 것 같다고 했다. 읽는 것만으로도 표출되는 무언가가 있다고 했다. 나는 엄마를 보며 어떤 여자들은 감탄과 깨달음의 ‘아!’가 아니라, 존재의 증명과 저항과 내면의 표출을 위해 ‘악!’ 소리를 내는 책을 읽는다는 것을 배웠다. 글자로 지르는 비명. 나는 엄마의 손에 들려 있던 전혜린의 책을 그렇게 기억한다. 어쩌면 전혜린의 존재앓이와 엄마의 그것을 혼동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을 무렵, 엄마의 책장에서 전혜린의 책을 꺼내 들고 물은 적이 있다.
“이 책도 우는 여자 이야기야?”
그때 내게 여성 작가들은 울거나 웅크리는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들의 자기 고백적인 글이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감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내 질문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빙긋 웃으면서 분명하게 답했다.
“아니야, 갈망하는 여자의 이야기야.”
갈망.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그 단어가 내 안을 파고들었던 것은 눈앞에 없는 어떤 것을 갈망하는 엄마의 낯선 눈빛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 적 없는 나의 안일함을 마주한 충격 때문이었을까. 그날 이후로 내가 전혜린의 책을 여러 번 펼쳐 봤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가 갈망하는 것을 찾기 위해, 아니 내가 갈망할 대상을 찾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전혜린의 책을 다시 만난 것은 기록적 무더위가 연일 이어지던 어느 여름이었다. 엄마가 유학 중이던 나를 만나러 파리에 왔고, 엄마의 가방에는 고추장, 된장, 꽁꽁 싸맨 반찬과 함께 전혜린의 책 두 권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낮 동안 땀에 흠뻑 젖어 파리의 관광지를 돌아다니며 싸우다가 집에 돌아와 찬물로 샤워를 하고 자매처럼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전혜린을 읽었다.
“담배 있어?”
열대야에 잠 못 이루던 어느 밤에 엄마가 물었다. 내가 아는 엄마는 한 번도 담배를 피운 적이 없었는데… 나는 가방에 숨겨둔 담배를 꺼내 엄마에게 건넸다. 엄마는 주방 창문에 몸을 기대고 담배를 피웠고, 나는 침대 옆 창문을 열고 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각자의 창에서 내뱉은 연기가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다가 살짝 부는 바람에 흩어졌다. 엄마는 자유로워진 것 같다고 했다. 거리를 향해 ‘악’ 하고 소리치면 시원할 것 같다고도 했다. 우리는 아주 조그맣게 ‘악’ 하고 속삭이다가 피식 웃었다. 엄마와 나는 목소리를 삼키는 데 더 익숙한 사람들이었으니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싸우거나 요구하지 않기 위해, 가짜 침묵을 위해.
어설프게 담배를 피우던 엄마는 전혜린을 동경했다고 말했다. 전혜린의 긴 손가락에 들려 있던 담배와 스카프와 그의 광기 어린 눈빛을 닮고 싶었다고 했다. 전혜린처럼 사랑이든 고독이든 절망이든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고, 엄마는, 그랬다고, 그렇게 말했다.
“눈앞에 보이는 게 끝이 아니라 그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 갈망할 수 있는 것 같아. 나는 늘 눈앞에 보이는 것 그 앞에서 멈췄던 것 같고.”
사라진 꿈을 이야기하던 엄마는 달리는 사람처럼 숨 가빴고 뜨거웠다. 이덕희 작가가 전혜린을 떠올리며 썼던 ‘짜라투스트라’의 문장처럼 “가장 긴 사닥다리로써 가장 깊은 데를 내려갈 수 있는 영혼, 가장 멀리 자기 안에서 달리고 번민하고 방황할 수 있는 가장 드넓은 영혼”이 있다면 그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갈망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안에 가장 깊은 곳을, 가장 먼 곳을 달린다.
그 밤에 담배를 손에 쥔 엄마는 내게 너무 낯선 존재였고, 그 생경한 감각이 나를 처음으로 엄마를 타자로 인식하게 했다. 나의 무엇이 아닌, 나와 다른 욕망을 품은, 나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존재. 그런 사람이 내 앞에 있고, 그게 나의 엄마라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는지! 그날의 엄마는 내게 타자를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줬다. 나의 모든 것이 그로부터 왔고, 그러니 내가 <나>를 외치고 쓰는 순간에도 나의 사랑하는 타자가 내 안에 기원으로 존재하고 있음은, 내가 <나>에 갇히지 않고, <타자>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이었다. 나, 자아, 그 너머에 가 보는 것. 그렇게 내게도 갈망하는 것이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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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 셰르브베크, ‘미완성 자화상’, 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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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란 타자를 쓰는 것, 타자와 함께 쓰는 것이라고 했고, 이제 나는 책 속의 울고 웅크린 여성들이 어떤 타자로부터 나와 그를 품고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여성이 가부장적 사회의 시선을 떨쳐내고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고 그가 갈망하는 것을 말하고자 할 때, 나는 그의 사닥다리가 되어준 타자들의 목소리를 함께 듣는다. 입을 다물고 움직이지 않기에는 삶을 너무도 사랑했던 여자들의 비명을. 식수가 말했던가, 문학 안에서 비명은 노래가 될 수 있다고.*** 아, 이제 깨닫는다. 전혜린의 글자들이 음표였다는 것을. 생을 향한 지독한 찬가였다는 것을.
*전혜린이 박인수 교수에게 보낸 편지 중.
**이언 블라이스, 수전 셀러스, <엘렌 식수>, 김남이 옮김, 책세상.
***엘렌 식수, <아야이! 문학의 비명>, 이혜인 옮김, 워크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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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책장 앞을 서성이고, 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우고 이야기를 꿈꿨다. 산문집 <창문 너머 어렴풋이>, <몽카페>, <열다섯 번의 낮>과 <열다섯 번의 밤>을 썼고, 아니 에르노의 <세월>, <진정한 장소>를 비롯한 여러 책을 옮겼다.@malletshin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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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봉이의 일기] 리뷰어 모집
레터를 통해 1년간 연재했던 신현아 작가님의 고양이 만화 [대봉이의 일기]가 책으로 출간됩니다. 전지적 고양이 시점의 대가족 제주살이 10년 일기장이에요. 개 둘, 고양이 둘, 인간 둘에서 고양이 넷, 인간 셋까지 시간을 달리는 다정다감 일상 관찰기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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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 기간 ~7.30(일) | 선정 발표 7.31(월)
•리뷰어로 선정되신 분께는 기재해 주신 이메일로 개별 연락드리오니 메일함을 잘 살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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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울이라 쓰지 않고] 문이영 작가 북토크 •한쪽가게(즐거운커피) | 7월 29일(토) 오후 2시 •신청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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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진 작가님 질문들이 참 좋네요. 북토크 참석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소묘레터로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요한 작업실에서 소묘를 그리는 지우님의 모습도 왠지 어울리는데요? 심미안에 대한 갈망이 늘 있는 제게 좋은 축적의 시간들을 주셔서 감사해요. 소묘의 동화 속 그림과 문장들 사랑하고요-♡ _해나
스물두 개의 빼곡한 질문지를 받아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질문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고 있지요. 나눌 수 있어 기뻐요. 아름다운 해나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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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은 하얀 캔버스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경계를 허무는 무한의 영역이라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그림책은 또 다른 세계였는데요 아이들과 그림책으로 수업을 하며 제가 얼마나 텍스트에 익숙한 사람이었는지를 절감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수업을 하며 그림책을 보는 시각이 확장이 되는 경험을 했거든요. 아이들이 상상하는 세계는 가시적 묘사를 넘어 경계를 허무는 또 다른 이야기로 확장이 되곤 했어요. 그림책 속의 삽화와 그림은 또 다른 텍스트가 될 수 있고 무한히 확장되는 공간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배워나갈 수 있었고요. 그리고 그 중심엔 다름아닌 사랑이라는 감각이 숨쉬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삶을 사랑하고 섬세한 것들에 감각을 열어두는 일, 그것이 그림책을 이해하고 삶을 배워가는 태도임을 알았습니다. 아이들과 함께하던 그 시간들이 저를 더 성장하게 했던 것 같아요. 이 아름다운 것들을 만지고 다듬어 세상과 나누고 소통하고자 하는 소묘의 노력이 더 소중하고 감사한 순간들임을 기억하는 편지였어요. :) _inyoung0408
그림책은 아이들과 읽을 때 정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 같아요. “경계를 허무는 무한의 영역”이라는 말씀 너무나 공감하고요. 섬세한 인영 님, 나눠주시는 이야기 언제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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