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인사는 늘 어렵습니다. 명절 인사는 늘 어렵습니다. 저마다 어떤 명절을 지내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다만 “함께 있는 온기는 느껴지되 혼자 누릴 수 있는 시간”이 깃들기를, 또 “다음에 오는 이를 위해 내가 지나온 길을 부수는” 해방이 있기를 바라며 ‘편애하는 여성의 텍스트’ 두 편을 띄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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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한샘
큰 명절이다.* 퍼지고 있는 바이러스로 인해 민족 대이동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 이미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영화가 나오는 화면을 틀어놓고 스마트폰에 눈을 고정한 채 무료한 연휴를 보내지 않으려나. 그렇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명절 당일만 쉬고 명절 다음날에는 문을 열어야겠다. 요즘은 세배도 원격으로 하고, 세뱃돈도 온라인 송금으로 받는 시대가 아닌가. 그러니 넉넉해진 마음으로 책방에 와서 책을 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심심한데 책방이나 갈까? 보내주신 용돈으로 책을 사는 게 어떠니? 거 참 책 사서 읽기 좋은 날이군. 같은 다정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웃으며 들어오는 인파로 16평 책방은 미어터질 것이다. 그야말로 대목, 대목이다.
나는 나의 상상에 번번이 속는다. 없던 돈이 생겼다고 사람들이 책을 사러 오지는 않아. 내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지만 귀를 막아버린다. 그동안의 데이터에 기반해 꽤 정확한 예측을 한 목소리를 악의 소리라 단정 짓고 외면한 대가로 아무도 오지 않는 책방에서 혼자 보내는 하루를 얻는다. 난방비가 아까워 난로도 틀지 않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처량한 모습으로 오들오들 떨면서 책을 읽는 멍청한 서점원. 그게 나다.
혼자 듣고 있자니 더욱 슬퍼지는 느릿한 음악이 책방을 채운다. 시린 발을 비비며 그 와중에 조금 졸기도 하며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자니 좀 억울해진다. 이제 두 시간 남았는데 그 안에 누가 올까.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까지 고파온다. 담요를 접어 차가워진 무릎에 올리며 생각한다. 오늘 문을 연다고 쓴 공지 글을 아무도 읽지 못한 것일까? 저 멀리 스코틀랜드의 중고 서점 운영자인 숀 비텔도 크리스마스 시즌에 문을 연 날, 그런 의문을 가졌었다.
맥이 빠질 정도로 한산한 날이었다. 아마 이 지역 방문객들이 우리가 문을 안 열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_숀 비텔, 《서점 일기》, 김마림 옮김, 여름언덕
하지만 이어지는 기록에 저 날 저 서점을 찾은 손님은 열네 명이었다고 적혀 있었다. 열네 명이라니! 내 책방의 일주일 손님을 다 합해도 될까 말까 한 숫자이다. 방문객이 있는 동네에 위치한 것도 아니요, 함께 일하는 동료도 없는 나는 스코틀랜드 서점 주인의 엄살에 코웃음을 친다.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조기 퇴근의 유혹과 싸우며 마감을 한 시간 남겨두었을 때 손님 한 명을 맞이한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저 귀인은 누구일까. 처음 보는 얼굴인 것 같지만 아닐 수도 있다. 바이러스로 인해 도래한 마스크 세상은 원래도 얼굴을 잘 못 알아보는 나를 더 큰 혼란에 빠뜨렸다. 오늘 처음 오셨죠? 해맑게 묻다가 어엇, 요즘은 다들 마스크를 쓰시다 보니 제가 잘 못 알아봐요, 라며 변명하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그 질문조차 안 하게 된 지가 오래다. 종일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아 잠겨 있던 목소리로 겨우 짧은 인사를 건네고 서둘러 난로를 켠다. 연휴에 에코백 하나만 들고 홀로 책방을 찾아오신 분. 음식 냄새와 티브이 소리에 질려 나 잠시 나갔다 올게, 하며 지갑과 핸드폰만 들고 탈출하신 것은 아닐까. 아니, 그러고 싶었던 사람은 나였다.
나는 그랬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스무 명의 국그릇과 밥그릇, 반찬이 묻은 접시와 수저가 담긴 설거지통이 나를 덮치지 않는 곳으로 빠져나가고 싶었다. 나를 빼놓은 그들의 웃음소리와 의미 없는 티브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고 뛰쳐나가고 싶은 여러 번의 명절이 있었다. 그렇게 뛰쳐나가서 도착하고픈 곳은 어디였을까. 이런 책방은 아니었을까. 지금 책방을 찾은 손님은 지난날의 내가 아니지만, 나는 그때의 내게 필요했던 것들을 드리고 싶어진다. 그러면 뛰쳐나가지 못했던 과거의 나도 조금 괜찮아질 것만 같다.
함께 있는 온기는 느껴지되 철저히 혼자 누릴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 드리고 싶다.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은밀한 움직임으로 스피커 쪽 서가로 가시면 볼륨을 약간 줄이고 어두운 쪽 서가로 가시면 전구의 밝기를 조절한다. 나는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며 과거의 나와 지금의 손님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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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집중한 손님과, 손님의 발길에 집중한 나 사이의 시간이 훌쩍 흐른다. 정확하게 마감 5분 전이 되니 고른 책을 카운터에 내려놓으시고, 나는 책들을 보고 이 손님이 처음 오신 분임을 확신한다. 이탈로 칼비노와 엘리자베스 문을 함께 사 가시는 분을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책에 띠지를 두르며 참지 못하고 물어보고야 만다. 가까이서 오셨나요, 아니라고요 그럼 어디서… 아, 그럼 운전해서 오셨나요. 잠깐 나갔다 올게, 하고 오셨다고요. 아우 잘 오셨어요… 끝나는 시간을 미리 보고 오셨다는 손님은 카드를 돌려받으며 오늘 열어주셔서 감사해요. 꼭 와보고 싶었어요. 라고 말한 후 책을 받아 들고 서둘러 나가신다. 그 말은 나의 오늘을 대목으로 만들어준다.
사람들이 많이 올 거란 상상은 애초에 아무런 근거 없이 오로지 나의 강렬한 바람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니 다음 명절에 또 문을 연다고 해도 사람들이 몰려오는 일이 생길 확률은 매우 희박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음에도 기꺼이 이 상상에 속으려 한다. 현재의 누군가를 통해 과거의 나를 만나기 위해.
* 어느 해 설날의 이야기를 써보았습니다. 2023년 추석에 리브레리아Q는 연휴 첫날만 쉬고 추석 당일과 다음 날은 문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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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31일 가정식 책방 ‘리브레리아Q’를 열었다. 이탈리아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지금은 책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다. 딸과 나눈 책 편지 《세상의 질문 앞에 우리는 마주 앉아》를 썼고, 그림책 《구름의 나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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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유진
나는 ‘여성의 텍스트’라 불리는 글들을 편애한다. 그런 글들은 기억이나 장소, 몸이나 질병, 하다못해 개를 이야기할 때도 언제나 여성의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내가 여성이기에 동병상련의 입장으로 그런 책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서사가 더 특별하다 여겨서도 아니다. 그저 그런 이야기들이 글로 쓰이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할 뿐. 말로 다 하지 못한 것, 말에 갇힐 수 있는 것, 그런 것이 글이 되지 않으면 무엇이 글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내가 아는 모든 여자는 자기만의 서사를 썼다. 밥 짓는 동안에, 어른들과 아이들을 돌보는 동안에, 시장에 가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는 동안에, 하다못해 마당에서 풀을 뽑는 동안에도 여자들은 자기 이야기를 했다. 혼잣말로, 수다로, 탄식으로. 그것으로도 다 할 수 없는 말들은 어딘가에 비밀스럽게 기록되었다.
김혜순 시인은 여성의 시 언어가 이제까지 밖에서 주어졌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반동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것이며, 여성의 언어는 본래 위반의 언어라고 했다.* 내가 아는 여성의 언어는 금을 내는 언어다. 다음에 오는 이를 위해 내가 지나온 길을 부수는 언어. 나의 여자들의 서사는 종종 “나처럼 살지 마라”로 시작됐다. 어느 어머니가 딸에게 “나처럼 살아라”고 말할 수 있었던가? 여자들은 그렇게 자기 부정을 통해 그들이 속한 세계를 위반했다. 각 가정에서 전해지는 여성 서사의 서문, “나처럼 살지 마라”의 본문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로 이어졌다.
아주 어릴 때, 엄마와 다른 삶을 사는 여성을 봤다. 엄마의 책장 맨 아래 칸을 차지했던 《라이프LIFE》 지에 실린 마릴린 먼로. 사진 속 마릴린 먼로는 기차에서 손을 흔들었고, 남자들은 예수 재림처럼 구원이라도 받으려는 듯 손을 뻗어 그녀를 만져보길 간절히 원했다. 일곱 살 여자아이에게 그녀는 남자들 머리 위에 있던 최초의 여성이었다. 식구들이 누워서 티브이를 보는 동안 무릎을 꿇고 바닥을 닦던 엄마와는 다르게 굽 높은 하이힐을 신고 웃음을 흘리며 세상을 내려다보던 여자. 엄마는 그런 미소와 몸짓은 타고난 것이며,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거울을 볼 때마다 마릴린 먼로에게는 있고 내게는 없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기 전까지 나는 내게 없는 것을 동경했다.
사춘기 시절 내게 이상적인 여성상은 오드리 헵번이었다. 물론 엄마의 영향이 컸다. 엄마는 종종 마릴린 먼로와 오드리 헵번을 비교하며 오드리 헵번이 가진 아름다움이야말로 진짜라고 말했으니까. 그녀가 아름다운 이유는 봉사에 바친 숭고한 삶이 컸지만, 그녀의 가는 허리와 자그마한 얼굴 역시 빼놓을 수 없었다. 한창 살이 찌던 십 대 시절, 엄마는 내게 다이어트를 요구하며 말했다. “오드리 헵번은 평생 샐러드만 먹었다더라. 모든 것에는 대가가 필요한 거야.” 그때 나는 샐러드 식단에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대가가 필요하다는 엄마의 말에 수긍했다. 티브이를 틀고, 잡지를 펼치면 대가를 치르고 아름다움을 획득한 여자들이 부러움을 샀다. 우리는 가슴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여성성을 말하진 않았지만, 플라스틱 인형처럼 마른 몸이 되는 희망 안에 우리의 여성성을 가뒀다. 유행하는 브랜드 옷가게에서는 66사이즈 이상의 옷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가 즐겨 보는 잡지에는 사과 다이어트, 포도 다이어트, 호박 다이어트 별별 다이어트 방법들이 소개됐다. 소위 뚱뚱하다고 놀림 받는 여자 코미디언이 오드리 헵번 흉내를 내면 상대역이 거북한 표정을 지었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웃었다. “살찐 여자는 게으른 거야”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고, 마른 몸을 칭송했고 부러워했다. 마릴린이 가슴을 더 내밀수록 열광하던 남자들과 허리가 더 가늘어지기를, 허벅지와 종아리가 얇아지기를 바랐던 우리가 무엇이 달랐을까. 마릴린과 우리는 그저 아름답게 보이고 싶었을 뿐이다. 타인의 눈에, 소비문화가 만든 여성성이라는 환상 속에.
성인이 되어 내가 처음으로 산 향수는 샤넬 n°5였고, 그 향수는 마릴린 먼로의 잠옷이라고 불렸다. 내가 그 향수를 뿌린다고 하면, “너도 그거 입고 자려고?”라고 물으며 이상한 눈빛으로 키득키득 웃는 남자애들이 있었다. 나는 멍청하게 웃는 그 애들에게 지기 싫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거나 더 야한 농담을 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세 가지 방식으로 저질 농담과 싸웠다. 몰래 울거나, 농담보다 더 강해지거나, 침묵하거나. 우리는 상대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이 망할 세상에 절대 딸은 낳지 않겠다고. 엄마들이 그랬듯이 우리 역시 우리의 여성성을 부정하며 우리가 속한 세계를 위반하길 원했다.
마릴린 먼로 때문에 향수를 바꿀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우아하다고 느꼈던 그 향기가 천박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런데 무엇이, 왜 천박한가? 어떤 여자가 자기 침실에서 나체로 향수를 뿌리고 자는 것은 토끼가 그려진 수면 바지를 입고 자는 것과 뭐가 다른가? 다르다. 내가 그녀를 남성 판타지 안에서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 판타지를 경멸하면서 마릴린 먼로를 그 안에 가뒀기 때문이다. 레일라 슬리마니는 말했다. “여성들은 아주 일찍부터 남성의 프리즘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데 익숙해졌다. 우리는 이렇게 마릴린을 보고, 이 광경을 보는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나는 요즘도 샤넬 n°5를 뿌린다. 그 향기가 내 몸을 감쌀 때 라이프지 속의 마릴린과 남자애들의 유치한 농담과 그 농담에 상처받았던 나를 떠올리며 그 옛날 엄마의 책장으로 돌아가 외친다.
“엄마, 마릴린 먼로는 수첩에 글을 썼대. 종잇조각에, 냅킨에, 요리책에도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글을 썼대.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대. 더 나은 배우가 되고 싶어 했대. 엄마, 우리에게는 마릴린 먼로를 해방해줄 책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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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매릴린) 먼로, 1955 photo by Michael Chekh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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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인 내게는 마릴린 먼로가 바람 부는 거리에서 치맛자락을 붙드는 이야기보다, 그녀가 종잇조각에, 냅킨에, 요리책에 썼던 글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누군가의 팬티 색깔이나 나체가 아니라 한 사람이 가진 내면의 색, 나체처럼 솔직한 언어가 궁금하다. 그렇다면 작가로서 나는 어떠한가? 그런 물음이 내 안에 찾아올 때면, 제대로 된 여성 서사를 말한 적 없음이 부끄러워진다. 솔직해지자. 모르기 때문이다. 여성 서사를 다룬 책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갈증을 느끼는 것은 타인의 지식이나 사유, 배움을 향한 목마름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나라는 여성, 시몬 베유도 실비아 플라스도 리베카 솔닛도 말할 수 없는 나라는 여성의 서사다. 그 미지의 세계는 내 몸과 기억 속에 여전히 잠형 중이다. 그러나 내가 정말 해야 하는 말을 하지 못하면서도 계속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은 그 세계를 꺼내보려는 시도가 아닐까. 슬리마니는 “문학은 현실을 재구성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부분을, 빠진 것을 채우는 데 쓰인다. 파내고, 그와 동시에 또 다른 현실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꾸며내는 것이 아니다. 상상하고 추억과 영원한 강박의 조각들을 서로 이어 구성한 하나의 시각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엄마의 책장 마지막 칸은 텅 비었다. 《라이프》 지는 오래전에 버려졌다. 엄마는 더 이상 어떤 여배우의 몸짓이나 향수, 몸매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이제 우리에게 마릴린 먼로는 빈칸이 됐다. 우리는 어떤 책으로, 어떤 이야기로 그 칸을 채워야 할까? 내가 아는 것은 덮거나 가리면서가 아니라 털어내면서, 없음을 드러내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나의 무지를 해부대에 올릴 필요가 있다. 가르고 찢어서 내가 발견한 진실에 하나씩 꿰매어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시작해 보면 어떨까?
나는 샤넬 N°5를 쓰지만 잠옷의 용도는 아니다. 내 잠옷을 당신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는 가는 허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을 위해 샐러드를 먹는다(정확히 곁들여 먹는다). 나는 마릴린 먼로를 잘 모르지만, 최근에 그녀가 강박적으로 기록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기록이 책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가 아는 여자들처럼 그녀도 써야 했을 것이다. 말로 다 하지 못한 것, 말에 갇힌 것들을. 그런 것들을 쓰지 않는다면 무엇을 써야 한단 말인가? 나는 엄마가 금을 낸 그 여성의 세계에서 벗어나 내가 살아갈 땅을 찾는 중이다. 나의 땅은 여성 명사이고, 나는 그 땅 안에서 쓴다. 내가 틀린 것을, 모르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을. 그런 것들을 쓰지 않는다면 무엇을 써야 한단 말인가?
* 김혜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 문학동네
** 레일라 슬리마니, 《한밤중의 꽃향기》, 이재형 옮김, 뮤진트리
*** 레일라 슬리마니, 같은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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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책장 앞을 서성이고, 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우고 이야기를 꿈꿨다. 산문집 <창문 너머 어렴풋이>, <몽카페>, <열다섯 번의 낮>과 <열다섯 번의 밤>을 썼고, 아니 에르노의 <세월>, <진정한 장소>를 비롯한 여러 책을 옮겼다.@malletshin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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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이벤트 ~10.4(수) | 발표 10.6(금) ─ 참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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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 소식 •<EXHIBITION> 원화 전시 ~10.5 (수요일, 추석 연휴 휴무) | 썸북스(마포구 성미산로 23길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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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토요일에는 비올레타 로피스 작가의 북토크가 열렸습니다. 글이 먼저 주어진 상태에서 그림 작가가 글을 얼마나 능동적으로 해석해 낼 수 있는지, 텍스트의 더께를 얼마나 풍성하게 쌓아갈 수 있는지 그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었어요. 책마다 매번 다른 스타일을 구사하는 로피스는 <고결쥐>가 젠더 문제를 여성의 관점에서 풀어낸 이야기라고 보고 ‘천’이라는 소재를 선택해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해요. 두 가지 천을 사용해 천 위에 페인팅을 하거나 두 천을 잇거나 오려서 붙이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한 원화, 꼭 만나보시기 바라요. •비올레타 로피스 작가에게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답장하기’에 남겨주세요. ~9.30(토) 질문과 답변은 인스타그램 통해 공유하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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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진 작가님이 쓰신 엄마 발에 관한 글....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번 달에도 좋은 글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_무기명
땅과 삶에 두 발을 디디는 뜨거운 이야기- 여운 깊었지요. “생을 뜨겁게 만나기 위해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내딛는” 가을 되시길 바라요. 답장 고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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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폭 삶은 따뜻하고 단 밤을 먹을 가을 밤이 기다려지는 편지였어요. 저는 두 가지의 기억이 떠올랐어요. 엄마와의 기억 하나 아빠 와의 기억 하나. 엄마는 가을이면 늘 밤을 삶아 먹기 좋게 하나씩 까서 큰 통에 담아 두셨어요. 그러면 오빠와 저는 티비 앞에 앉아 엄마가 까두신 밤을 손쉽게 집어 먹곤 했지요.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탓일까 저도 가을이면 밤을 사와 폭폭 삶고 하나씩 까서 큰 통에 담아두는데요,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과정인지 직접 해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답니다. 제가 사오는 밤은 마트에서 소분해 파는 작은 봉지가 전부이지만 엄마가 까두시던 밤은 꽤나 많은 양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손가락이 얼마나 얼얼하셨을까요. 엄마는 한 번도 힘들다 말씀 하시지 않으셨지만, 제가 아이들 간식을 위해 밤을 삶아 까고 있다고 하면 제 손이 아플까 걱정하십니다. 손주 손녀가 사랑스럽다지만 여전히 딸의 아플 손가락이 더 걱정인 것을 보며 말없이 밤을 까시던 엄마의 시간을 떠올려봅니다.
아빠와의 기억은 넓고 따뜻했던 아빠의 등이에요. 찬바람이 불면 외할머니 댁에서 만두를 빚어 만두국을 끓여 먹는 것이 연중 행사였는데요, 귀가가 늦어지는 밤이면 차 안에서 잠이 든 저를 업고 계단을 오르던 아빠의 등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아빠의 냄새, 아빠의 숨 소리, 아빠 살의 온도, 귓속에 웅웅 울리던 아빠의 말소리 등. 살아있는 아빠의 감각과 저의 감각이 섬세하게 교차하던 그 순간을요. 실은 아빠 등에 업히며 잠이 깨버렸지만, 그 순간이 너무 좋아 애써 잠든 척을 했던 저를 떠올리게 되었어요. 이제는 작고 연약해진 부모님의 모습에 젊고 건강했던 부모님의 날들을 교차해봅니다. 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잠시 멈추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어요. 그러나 잠시 멈춘다고 삶이 더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쉼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 라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야속한 시간,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두려움을 자아내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존재하기에 사라질 것이고 그러므로 아름다울 삶을,
생성이 있으니 소멸도 있을 삶을 생각해봅니다.
밤은 참 이상하네요. 어두운 밤도 달콤한 밤도 아련한 기억을 불러오니까요. _inyoung0408
한샘 작가님의 밤 이야기가 또 다른 밤 이야기를 데려왔네요 :) 좋아하는 시도 함께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말씀드리면 부담이 되실까 미루고 미룬 말을 이제야 적어봅니다. 꼬박꼬박 보내주시는 답장 덕분에 하나의 연재가 더 생긴 것 같아요. 인영 님의 글을 기다리는 것은 저만이 아닐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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