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당신도 나와 함께 읽고, 나와 함께 이야기하자고 그 책들을 건넨다.” “그러니 당신도 나와 함께 읽고, 나와 함께 이야기하자고 그 책들을 건넨다.” _신유진 “우리의 마음이 비슷한 지점에서 일렁였기에 책을 통한 질문과 연결이 반갑고 고마웠다.” _정한샘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들 하지만, 정작 실제 독서율은 가장 떨어지는 계절이기도 하죠. 그러니 이 아름다운 계절에 책을 고르고 건네며 새로운 이야기의 길을 내는 손들을 떠올리면 더 애틋해질밖에요. 엄마의 책장에 나의 책들을 들고 가는 마음과, 정성과 고집으로 공들여 책을 고르는 마음을 전합니다. |
|
|
글: 신유진
금발머리 여자가 수술대 위에 누워 있다. 세상에 나오지 못한 아기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자의 모든 결핍에는 아버지의 부재가, 불행의 근원에는 임신중지 수술이 있다. 여자는 현실이 컷 없는 영화 같다고 느낀다. 금발의 여자는 두 개의 이름, 노마 진과 마릴린 먼로 사이에서 갈등한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블론드》를 각색한 영화, 〈블론드〉의 이야기이다.
그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불 꺼진 강당. 하얀 커튼 뒤에서 손전등의 불빛이 움직였다. 손전등을 쥐고 있었던 것은 폴란드 여자애였다. 나는 마리오네트를 들고 손전등의 움직임에 따라 동작을 맞췄다. 우리는 서로 대사를 주고받았다. 불빛은 태어나지 못한 아기를 상징했고, 마리오네트는 아직 엄마가 되지 않은, 어쩌면 영원히 엄마가 되지 않을 여자애였다.
우리는 연극과 학생들이었다. 보수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현대 연극 수업 조별 실기 평가에서 권태에 시달리거나 화가 날 정도로 천진한 여자들이 나오는 연극이 아닌, 진짜 여성의 텍스트를 무대에 올리길 원했다. 그때 우리에게 진짜 여성의 텍스트란 금기를 깨는 이야기, 여자들이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소리 내 외치는 글이었다. 우리는 조이스 캐럴 오츠의 희곡, 〈나는 발가벗은 채로 네 앞에 있어〉 중에서 임신중지를 다룬 이야기를 골랐다.
우리가 준비했던 공연을 마치자 혹평이 쏟아졌다. 진부했다, 무겁다, 무거운 주제를 너무 무겁게 다뤘다, 대체로 그런 반응들이었다.
“낙태라니… 미안하지만, 이런 주제는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엄마의 책장에서 먼지 쌓인 68년도 책을 꺼내 보는 느낌이었어요.”
프랑스 여자애가 날카롭게 비평했다. 우리는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그 비평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책장에서 꺼낸 먼지 쌓인 조이스 캐럴 오츠는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 엄마가 그 작가의 적나라한 언어를 읽는다면 뭐라고 했을까. 성관계의 위험성, 정확히 임신이 얼마나 내 인생을 망칠 수 있는지 가르치려 하지 않았을까. 교수님은 외국인인 우리를 배려해 68년 문화 혁명*을 설명해 줬다. 몇몇 학우들이 ‘부모님 세대’가 읽었던 여성주의 작품들을 말했지만, 그들이 언급한 책 중에 엄마가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셨어요. 문학을 좋아하셨지만, 어머니가 읽었던 책은 전원의 삶을 다루거나 인간의 욕망을 비판하는 책이었죠. 그중에서도 자유롭게 욕망을 추구한 젊은 여성들은 늘 벌을 받았어요. 임신이라는 벌이었습니다.”
폴란드 여자애의 말에 강당이 조용해졌다. 68년 문화 혁명을 알았거나 몰랐거나, 욕망에 솔직했거나 아니었거나 그 강당에 있던 여자애들 중에 임신을 축복으로 맞이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피임약 복용을 잊었거나 생리가 늦어질 때, 우리 중 어느 누가 “신이시여, 감사합니다!”라고 외칠 수 있었겠는가! 그날 그 공연의 호불호에 상관없이 거기에 있었던 여자애들은 ‘임신은 벌’이라는 말을 차마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강당을 떠났다.
임신은 정말 벌이었을까? 적어도 내게는 그랬던 것 같다. 임신이 나의 자유와 미래를 망친다고 믿었던 이십 대 때부터 임신에 실패했던 삼십 대까지. 나는 사회적 통념 안에서 임신을 원치 않았고, 또 임신하기를 바랐다. 진짜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여성의 몸의 선택지는 늘 두 가지뿐인 것 같았다. 모성을 회피하거나 모성을 위해 존재하거나.
스물다섯 가을, 임신중지를 결정한 친구와 함께 파리 근교에 있는 병원에 갔다. 우리는 영화에서 봤던 끔찍한 장면을 상상했으나 임신중지가 합법인 프랑스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판단도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의사가 친구에게 준 것은 알약 한 알이었고, 친구는 의사가 보는 앞에서 그 약을 삼켰다.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고,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자신을 헤치지 않고 잘 살아가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교회를 다닐까?”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친구가 그렇게 말했을 때 피식 웃었지만, 그때만큼은 나 역시 무언가를 붙잡고 간절히 기도하고 싶었다. 이 미성숙하고 연약한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무언가가 있다면 내게 주어진 반쪽짜리 자유를 망설임 없이 반납하고 싶었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배웠어야 했을까? 그 시절의 우리를 떠올리면 돌아가 안아주고 싶다. 무엇이 자신을 위험하게 하는지 몰랐던, 자신을 지키는 일이 전쟁 같았던, 사회적 통념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나 정작 자기 자신은 몰랐던 나와 나의 여자애들. 알았거나 몰랐거나 말했거나 침묵했거나 적극적이었거나 소극적이었거나 우리는 모두 우리의 몸이 불행의 근원이 되지 않도록 고군분투했으므로.
|
|
|
1974년, 당시 프랑스 보건부 장관이었던 시몬 베유는 국회 연단에 서서 말했다. “임신중절 수술을 즐겁게 받는 여성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문제는 그저 여성의 말을 듣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성에게 낙태는 비극이고 언제나 그러할 것입니다.” 이후 프랑스 임신중지 합법화 법안은 표결을 통해 통과됐다. |
|
|
마릴린 먼로가 임신중지 수술의 죄책감에 시달리는 장면을 보면서 그때 그 프랑스 여자애의 말을 떠올렸다. 지키지 못한 모성은 죄라는 이 진부한 이야기는 왜 여전히 계속되고 있을까. 왜 여자의 몸은 아직도 타인들이 일으킨 논쟁의 장이 되어야 하는가. 금기를 깨는 것만으로도 나를 흔들었던 그 여성의 텍스트들은 얼마만큼 나아갔을까. 문득 다른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노마 진이 사랑을 갈구하는 이야기가 아닌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이야기, 마릴린 먼로가 태어나지 못한 아이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야기가 아닌, 돌봄이 필요한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사랑을 느끼는 이야기. 긴급하고 절박함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비상하는 여성의 이야기. 이제 그런 이야기가 우리에게 와주면 안 될까.
마리오네트였던 여자애는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나의 욕망을 마주하기까지 내게 필요했던 것은 버지니아 울프, 에이드리언 리치, 리베카 솔닛, 비비언 고닉, 김혜순, 데리언 니 그리파 같은 여성들의 목소리였고, 나는 그들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여성의 텍스트가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타인 또는 주변 환경에 의해 자신이 지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글,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고 그것을 분석하며 이해하는 글, 남성 중심적 사회가 부여하는 의미에 의해 삭제되거나 밀려난 것을 복원하고 조명하는 글, 그런 여성의 텍스트들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수술대 위에 누운 마릴린 먼로를 바라보며 자궁이 있음을 끔찍하게 여기거나 여성의 모성을 죄책감으로 오해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제 나는 내게 절실했던 여성의 텍스트를 들고 엄마에게 간다. 나의 엄마를, 모성을 다시 배우고 싶다고, 당신을 희생 하나로 축소된 존재가 아닌 건강하고 다양한 욕망을 가진 한 인간으로 마주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니 당신도 나와 함께 읽고, 나와 함께 이야기하자고 그 책들을 건넨다. 내가 엄마 안에서 폭발할 것 같은 여성의 에너지를 발견한다면, 그것을 옮길 수 있다면, 금기와 불행과 희생을 뛰어넘은 그다음 이야기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자궁이 축복의 전부이거나 불행의 전부이지 않은 이야기, 모성과 감성, 이성과 야성을 두루 가진 존재의 이야기.
엄마, 당신은 어떤 여성입니까?
이제 엄마, 당신이 대답해 주길. 당신이 자유로움을 느끼는 순간, 오롯이 혼자인 순간, 그때 당신이 느끼는 감정, 누군가와 연대하고 있다는 기분, 당신이 추고 싶은 춤, 당신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부르는 노래. 엄마를 제외한, 아니 엄마를 포함한, 그러나 그보다 더 커다란 엄마의 진짜 이야기.
귀 기울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여성의 텍스트. 단 한 방울의 절망도 섞지 않은 엄마의 이야기.
* ‘5월 혁명’이라고도 불린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 혹은 노동자들이 일으켰던 기존의 혁명과는 달리 학생들이 주축이 된 혁명이었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라는 구호 아래 기성 체제에 대한 저항과 성적 자기결정권과 표현의 자유를 역설했다. |
|
|
엄마의 책장 앞을 서성이고, 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우고 이야기를 꿈꿨다. 산문집 <창문 너머 어렴풋이>, <몽카페>, <열다섯 번의 낮>과 <열다섯 번의 밤>을 썼고, 아니 에르노의 <세월>, <진정한 장소>를 비롯한 여러 책을 옮겼다.@malletshin_ |
|
|
글: 정한샘
어릴 때는 책을 참 좋아했어요.
좋아해서 많이 읽었던 것 같은데, 모르겠어요. 언제부터 안 읽었는지.
고등학교 이후로는 읽은 책이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런데 다시 읽고 싶어요.
처음 책을 사러 와 말하던 ㅅ의 눈빛이 기억난다. 저 말을 건네기 전 꼼꼼하게 서가를 둘러보던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다시 책을 읽겠구나. 좋아하게 되겠구나. 그 세계로 다시 들어갈 책을 추천해 주고 싶었다. ㅅ의 일터와 나의 일터가 열 걸음도 되지 않게 바로 곁하고 있지만 마스크 아래 얼굴은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2020년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골라놓은 책 중 두 권을 손에 들고 나가며 ㅅ은 오래 비어 있던 공간에 책방이 들어와 참 좋다는 말을 천천히 꾹꾹 눌러 말했다.
나는 책을 파는 사람인가? 독서 모임을 이끄는 사람인가? 읽은 책을 소개하는 사람인가? 나는 책을 고르는 사람이다. 책방 운영 4년 차에 들어서며, 지금의 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은 책 고르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매년 수만 권의 책이 출간된다. 그중 작은 책방의 서가에 판매용으로 들어올 수 있는 책은 한 해 최대 몇 권일까. 매출이 아주 잘 나오는 유명한 동네 책방이 아니고서야 한 해에 들일 수 있는 신간의 수는 아마도 수백 권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다른 책방 주인들의 일과를 세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대부분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책을 고르는 데에 사용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수만 권 중 수백 권을 골라내는 일을 하려면 매일 눈이 빠져라 화면을 보고, 좋아하는 작가 또는 출판사의 신간을 확인하고, 모르는 작가의 흥미로운 책이 눈에 띄면 일단 한 권만 사서 먼저 읽어보고, 책방에 놓을 공간이 있는지 살핀 후 주문을 하는 날들이 반복되는 것이다. 혼자 운영하고 있다면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어떤 책을 들일지 말지를 혼자 결정하고 혼자 책임져야 한다. 모두가 좋아할 만한 책보다는 이곳에서 특별히 만나는 느낌을 주는 책을 찾는 것에 열중한다.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거냐고 묻는다면 책방의 선택을 믿고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고른 책, 내가 모르는 책을 권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한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방문 리뷰 중 ‘눈을 감고 골라도 좋은 책을 안고 나가는 곳’이라는 글이 있었다. 아무 책이나 골라 나가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고른 책들이 사랑받는 글이어서 기뻤다. 너무 좋아서 하마터면 출력해서 벽에 붙여둘 뻔했다. 공들여 고른 책들이지만 누군가는 빠르게 지나쳐 버리는 책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조금은 안다.
이곳에서 책을 안심하고 골라 가는 데에는 아주 큰 전제가 따른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이,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분노하고 상처받는 지점이, 그 안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존재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로 인해 웃고 우는 마음이 비슷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곳의 책들은 마치 외계의 다른 세상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질 것이고 그저 한 번 둘러보는 곳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곳은 그저 까다로운 한 인간의 개인적인 취향을 통과한 책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집 센 곳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니 이 동굴 같은 곳에 한 번 오고, 두 번 오고, 열 번 오는 사람들은 얼마나 특별한 사람들인가. 아침에 주문하면 밤에 받을 수 있는 곳을 마다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주문서 작성을 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특별한가. 그렇게 책방을 이용하고 얻는 것이라곤 어디에도 쓸모없는 ‘단골’이라는 이름뿐인데 말이다. 쓰다 보니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는 성인의 절반 이상이 일 년에 책 한 권을 안 읽는 나라이니*, 책을 읽다 못해 취향이 맞는 곳을 찾아 작은 동네책방까지 스며들어 단골이 된 사람들은 이미 이해의 영역을 넘은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빠르고 재미있는 것이 넘치는 시대에 종이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고 있다니, 어쩌면 그냥 이상한 사람들인 건지도. 그 이상한 사람들 덕분에 책방은 문을 닫지 않고 매달 임대료를 내고 있다.
|
|
|
ㅅ은 천천히 자기만의 속도로 책을 읽었고, 또 읽었고, 계속 읽어나갔다. 책을 추천하는 일은 곧 끝났고 ㅅ의 공간에는 ㅅ의 색을 입은 책이 쌓여갔다. 내가 골라놓은 책 중에서 ㅅ의 손으로 옮겨 간 책과, ㅅ이 직접 골라 내게 예약하고 찾아간 책 사이에는 길이 생겼고, 그 길에서 만들어진 작은 갈래들은 질문이 되어 다른 책으로 연결되어 갔다. 우리의 마음이 비슷한 지점에서 일렁였기에 책을 통한 질문과 연결이 반갑고 고마웠다. 작은 일렁임이 파도가 될 때까지 매일 같은 정성으로, 같은 고집으로 책을 고를 것이다. 이상한 사람들이 계속 찾아오는 한.
*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2021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만 19세 이상 성인 중 1년간 종이책을 한 권 이상 '읽은' 연간 독서율은 40.7%라고 한다. |
|
|
2020년 7월 31일 가정식 책방 ‘리브레리아Q’를 열었다. 이탈리아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지금은 책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다. 딸과 나눈 책 편지 《세상의 질문 앞에 우리는 마주 앉아》를 썼고, 그림책 《구름의 나날》을 옮겼다.
|
|
|
🐯 [월간소묘: 살롱] 11월 ‘고양이의 시간’ 아주 오랜만에 소묘살롱 소식 전합니다 :) 오후의 소묘 책들에는 유난히 고양이가 많이 등장하는데요. 특히 올해 펴낸 여섯 종 중 세 권은 고양이가 주인공이고요, 나머지 세 권에도 작게나마 고양이 그림이 있다는 사실 아셨을까요? 고양이가 나오는 소묘의 그림책과 만화 중 각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한 권씩 꼽아오셔서 같이 읽어요. 모처럼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 고양이로 가득 채워질 것 생각하니 몹시 즐겁습니다. 반갑게 만나요 😽 •일시: 11월 4일(토) 2시 30분—5시 •장소: 오후의 소묘 스튜디오(서울시 은평구 응암로21길 4) •참가비: 10,000원(다과 제공) •신청하기 |
|
|
‘내가 틀린 것을, 모르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을. 그런 것들을 쓰지 않는다면 무엇을 써야 한단 말인가?’ 질문으로 끝나지만 묘하게 위로가 됩니다. 어떤 글을 읽고 싶으냐고, 무엇을 쓰고 싶으냐고, 왜 그러고 싶으냐고 나에게, 또 해방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묻고 싶어지네요. 다음 달에 만나요. 기다립니당 :) _해나
질문이 위로가 된다는 말씀에 어쩐지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받아 안은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날들이었을까요? 어쩌면 새로운 질문을 더해가는 날들이었을지도 모르죠. 어느 쪽이든 해나 님의 이야기도 기다릴게요. 고맙습니다 :) |
|
|
우표를 붙여 보낸 편지를 기다리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혓바닥을 내밀어 침을 묻힌 우표를 봉투에 조심스럽게 붙이고 빨간 우체통으로 갔죠. 입을 벌린 우체통에 빨려 들어가듯 편지가 들어가면 이제는 기다림의 시간들입니다. 그 시간이 참 행복했어요. 기다리는 것이 가능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소묘 레터가 그때의 기쁨과 설렘을 대신해주는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
어릴 적 엄마의 책장에서 읽었던 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제목만 기억에 남아 있는 에세이와 사진집이었는데요. (…) 거대한 자연 속에서 여성의 몸을 예술적으로 찍은 사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누워 있거나 웅크리거나 앉아 있거나 뒤돌아 서 있는 여성들의 몸이 통통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럼에도 그런 사진을 찍었다는 것에 의문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의 몸이 아니었던 거죠. 신유진 작가님의 문장 중에 "우리는 가슴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여성성을 말하진 않았지만, 플라스틱 인형처럼 마른 몸이 되는 희망 안에 우리의 여성성을 가뒀다" 라는 문장에서 당시의 저를 지배하던 여성성에 대한 환상을 꺼내볼 수 있었습니다. (…) 마른 여성에 대한 칭송과 환상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환상의 이유는 당연히 남자에게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한 것이었고요. 지금은 물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달라져야 했어요. 달라지고 싶습니다. 몰랐으니까요.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알고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새롭게 읽기였습니다. 제가 읽었던 모든 텍스트들에 의문을 갖고 반항을 해보았습니다. 새로운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앞으로도 계속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읽고 저항하고 달라지고 싶습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저는 변하고 새로워지고 싶으니까요. 무엇보다 저는 아들과 딸을 키우고 있는 엄마니까요. _inyoung0408
전해드리는 편지와 인영 님의 답장 사이에 새로운 길이 나고 있네요. ‘작은 일렁임이 파도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부득이한 중략 양해 부탁드리며) 언제나 성실한 수신인, 그리고 발신인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