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시마 섬의 존재를 알게 된 건 그림 그리는 친구 K를 통해서였다. 몇 해 전 그는 일본 시코쿠 지방의 가가와현을 방문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섬 전체가 미술관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있다고, 온종일 그곳을 거닐며 예술의 비호를 받는 기분이 꽤 유쾌했노라고, 너도 분명 그곳을 마음에 들어 할 거라고.
한참 잊고 있었던 그곳을 떠올린 건 마음이 물에 잠긴 종이처럼 낮게 가라앉았을 무렵이었다. 책임과 의무를 앞세우느라 정작 나를 돌보지 못해 제대로 고꾸라졌던 때. 나는 몸이 보내는 위험 신호를 읽었고, 즉흥적으로 비행기 티켓을 샀다. 짐을 꾸려 출발하기까지 사흘도 채 걸리지 않은 여행이었다.
K가 이야기했던 나오시마는 작은 천국 같았다. 구사마 야요이나 이우환, 안도 다다오처럼 굵직한 예술가들의 작업물들이 곳곳에 툭툭 놓여 있어 그저 지도의 안내를 따라 점과 점 사이를 잇기만 하면 되었다. 고층 건물이 없고 사방으로 바다가 면해 있어 눈이 씻기는 느낌이 드는 곳. 전동 자전거를 빌려 섬을 한 바퀴 돌며 ‘아,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생각했다. 하지만 내게 허락된 시간은 많지 않았다. 워낙 짧은 일정으로 떠나왔던 터라 나오시마 섬 하나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채 내륙으로 가는 마지막 배를 타야 했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섬 속의 섬까지 다녀갔을 것이다. 나오시마에서도 한 번 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데시마 섬과 그곳에 자리한 데시마 미술관. 그곳에 는 단 하나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물방울이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물방울. ‘나이토 레이内藤礼’의 〈매트릭스母型〉(2010)라는 작품인 그 물방울은 바닥 경사로의 표면장력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생성되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 말인즉 내가 어떤 기후, 어느 시간대에 그곳을 방문하느냐에 따라 마주하게 되는 물방울의 양상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나는 왜 그 장면을 마주하고 싶었던 것일까. 언제나 가본 길보다 가지 않은 길이 더 찬란해 보이는 법. 나오시마 섬을 떠나온 뒤에야 사실 내가 진짜 가고 싶었던 곳은 데시마 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위가 어두웠고, 배는 내륙에 거의 다다라 있었다.
그날 이후 머릿속에서 물방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세상 어딘가에 물방울을 위한 건축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얼마간 안도를 느끼기도 했지만 이내 생각의 방향은 물방울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환원되었다. 어쩌면 내가 쓰는 한 편 한 편의 시도 물방울을 위한 집 짓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 제아무리 최고급 자재를 들여 근사한 건축물을 지어놓았다 하더라도 정작 그 안에 물방울이 맺히지 않는다면 다 부질없다는 생각. 자크 프레베르의 시 〈어느 새의 초상화를 그리려면〉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일단 새장을 그린 뒤 새가 찾아올 때까지 침묵을 지키며 기다려야 한다고. 새가 새장 안으로 날아왔다면 모든 창살을 지우고 새가 노래할 수 있게 바람과 햇빛, 풀숲 벌레들을 그려야 한다고. 새가 노래하기 시작한다면 좋은 징조이지만 노래하지 않는다면 그림이 잘못되었다는 징조라고.
내 시의 집들은 물방울이 찾아오기에 좋은 거처였던가. 물방울의 ‘맺힘’이란 무엇일까. 사라짐을 예비한 맺힘에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안간힘이 내장되어 있나. 생각의 구름떼가 곧 비를 뿌릴 것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나의 머릿속에선 이런 일이 수시로 벌어진다.
(…중략…)
우리 내면의 무언가가 말할 때, 내가 아니라 그것이 나의 몸을 빌려 더듬거리며 말할 때, 나는 그것을 받아 적는 사람이다. 입 없는 존재들의 몸짓을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이 모든 일은 책상에서 이루어진다. 백지는 끊임없이 열리고 닫힌다. 비록 나는 좁은 방안에 갇힌 면벽의 유령이지만 책상만 있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이를테면 그곳을 떠나온 뒤에야 진짜 내가 가고 싶었던 장소는 ‘데시마 미술관’이었음을 깨달았던 그날의 배 안으로도. 너무 갑작스러운 전개인가? 하지만 백지 위에서라면 못 갈 곳도, 못 할 일도 없다. 나는 뱃머리를 돌려 데시마 섬으로 가본다.
*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선착장에서 미술관까지는 거리가 꽤 된다. 어차피 마지막 관람객들은 다 떠났을 테고 미술관 문도 닫혀 있을 테니 천천히 걸어가기로 한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서 아픈 존재들이 떠오른다. 바람이 자신을 통과할 때마다 얼굴에 빗금이 생겨난다는 나의 올빼미. 우리는 함께 걷는다.
“‘섬의 밤’과 ‘밤의 섬’은 어떻게 다르지?” 내가 물으면 “너는 ‘섬의 밤’에 있고 나는 ‘밤의 섬’에 있어. 하지만 우리는 나란해” 네가 말한다.
고대하던 미술관 입구가 보인다. 듣던 대로 근사한 건축물이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간다. 문으로 들어온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벽으로 들어온 것도 아닌데 우리가 어떻게 여기 들어와 있지?”
“이 바보야, 우리는 지금 네 방 네 책상 앞에 있잖아.”
우리는 쪼그려 앉아 물방울을 본다. 물방울은 영롱하게 맺혀 있다. 크기는 작지만 무거워 보인다. “고작 물방울 하나를 위해 이렇게 큰 집이 필요했을까?” 내가 푸념하듯 묻자 물방울은 그런 서운한 말이 어디 있냐는 듯 위태롭게 좌우로 흔들리다가 저 먼 곳, 이름 모를 누군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봤어? 물방울이 사라졌어.”
너는 대답이 없다.
“‘밤의 섬’으로 돌아갔을까?”
너는 대답이 없다.
며칠 뒤 너는 낯선 이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게 된다. ‘눈물이 너무 무거워 책상에 엎드려 있었어요. 눈물방울 하나가 눈가에 오래 매달려 있었는데… 영원히 떨어뜨릴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어디선가 눈물을 찾는 전화벨 소리가 들렸고 그 순간…’
(계속)
*
즉흥적으로 떠오른 이 이야기는 시일까? 나는 정말 ‘데시마 미술관’에 다녀오지 않은 것일까?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면의 무언가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 책상에 앉으면 수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책상이 닻을 올리고 항해를 시작한다. 우중의 숲길이다가도 순식간에 사막이 펼쳐지는 곳. 둥지의 알을 쓰다듬다가도 뜬금없이 번지점프를 하는 곳. 이 책상의 이름은 가능성이다. 이곳은 나의 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