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은 언제나 너무도 커다랗게 다가오는 달입니다. 멈춰버린 시간들이 있고 우리는 그 가장자리에서 맴돌고 있 “두려움이라는 선을 넘어 한 발짝 다가가는 일을 계속해서 시도한다. 책방 주인이라는 자리를 이용해 기획되고 의도된 운명과 음모를 봉투에 넣어 보낸다.” _정한샘
“너무 커다란 것은 뛰어넘는 게 아니라 뛰어들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엄마는 그리고 싶은 그림 속에 뛰어들었을까? 엄마라면 그랬을 것 같다.” _신유진
사월은 언제나 너무도 커다랗게 다가오는 달입니다. 멈춰버린 시간들이 있고 우리는 그 가장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만 같아요. 그러나 ‘멈춰 있는 순간에도 지속되는 삶’을 사랑하는 연습을 멈추지 않는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이것은 레터 발행인이라는 자리를 이용한 저의 ‘기획되고 의도된 운명과 음모’랍니다. 여러분이 저희의 공모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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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유진
엄마는 화집을 모았다. 우리는 종종 책장을 채운 화집을 꺼내 보면서 가장 좋아하는 그림과 화가를 꼽아보곤 했다. 두 사람의 취향이 비슷했던 때도 있었고, 너무 달라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던 시간도 있었다.
파리에서 살던 시절에 헌책방에서 화집을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엄마와 함께 봤던 그림을 다시 보는 반가움 또는 향수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엄마가 알려줬던 그림의 제목과 프랑스어 제목을 비교해 보는 일이 작은 즐거움이었다. 어쩌면 나의 언어는 엄마가 쥐여준 것과 내가 발견한 것 사이에서 자랐는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어를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화집을 보다가 정물화를 뜻하는 단어가 ‘Nature morte*’라는 것을 알고 놀랐던 적이 있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생명력 없는 사물이라는 뜻이지만, 직역밖에 할 줄 몰랐던 그때는 ‘죽은 자연’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했고, 정물화를 보면 ‘죽은 자연’을 그리던 엄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는 그림을 배운 이후로 정물화를 자주 그렸다. 언젠가 엄마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정물화는 집에서 노는 여자들이 그리기 좋은 그림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어릴 때 ‘여자들’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문장 중에 듣기 좋은 소리는 거의 없었지만, 미술의 한 장르조차도 모욕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때 이후로 정물화를 좋아하게 됐다. 누군가 한계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해 버리는 것, 그것은 내가 저항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엄마가 남겨 놓은 에두아르 마네의 화집을 본다. 내 시선을 끄는 것은 <풀밭 위의 점심 식사>, <피리 부는 아이>, <올랭피아> 같은 대표작이 아니라, 화병에 담긴 꽃을 그린 그림이다. 나는 그 그림 앞에서 멈추고, 내 앞에는 나처럼 멈춘 꽃과 화병이 있다. 멈춰 있는 것과 움직이는 것을 그리는 것은 뭐가 다를까? 그리는 사람의 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멈춘 것들은 상상의 방향을 바꾼다. 다시 말해 멈춘 것은 멈춘 것 자체가 아니라 그 건너편을 상상하게 한다. 꽃이 아니라 꽃의 건너편에 있는 사람, 꽃을 바라보는 사람 말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보는 것은 꽃과 화병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마네다.
마네는 말년에 꽃을 그렸다. 악화된 건강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그에게 그릴 수 있는 것은 문병을 온 손님들이 들고 온 꽃이 전부였다. 꽃병에 꽂은 꽃을 보며 “이것들을 다 그리고 싶어”라고 말했다던 마네는 내게 투명한 유리병과 작은 꽃을 거대한 우주처럼 보이게 한다. 한계에 부닥친 순간에 다시 들끓는 인간의 열망만큼 커다란 것이 있을까.
“다 그리고 싶어.”
언젠가 엄마가 내게 했던 말이기도 하다. 하얀 캔버스와 사과와 꽃병과 접시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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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 <크리스털 화병의 카네이션과 클레마티스>, 18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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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엄마는 붓질을 시작하기 전에 늘 망설였다. 낯선 언어를 처음 내뱉기 전에 짧은 숨을 내쉬거나 침을 꼴깍 삼키는 것처럼. 나도 그렇다. 첫 문장을 쓰기 전에 언제나 망설임의 시간을 통과한다. 어떤 것을 향해 자신을 완전히 열기 전에, 경계를 넘기 전에 경직되어 버리는 것은 망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얀 캔버스도 하얀 화면도 우리에게는 너무 커다란 세계니까.
이브 버거는 아버지 존 버거에게 삶에는 늘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큰 것이 있고, 저마다 그 큰 그것을 다룰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고, 존 버거는 우리가 말하는 거대함이 우리가 직면한 어떤 것이 아닌 우리를 포함한, 우리를 둘러싼 것이어야 한다고 답했다**. 너무 커다란 것은 뛰어넘는 게 아니라 뛰어들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엄마는 그리고 싶은 그림 속에 뛰어들었을까? 엄마라면 그랬을 것 같다.
엄마의 그림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첫 번째로 품었던 질문은 엄마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나 동기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써야 할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에게 질문을 건네는 쉬운 방식을 택했다.
“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
“테레빈유랑 린시드유 특유의 냄새가 있어.”
엄마의 답은 질문과 상관없이 이야기의 가장자리를 맴돌았다. 테레빈유와 린시드유의 냄새를 따라가다 보니 기억의 문이 열리고, 어느새 나는 핵심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더는 중요하지 않은 장소에 들어가 나와 엄마의 기억을 바라본다. 엄마가 작업실에 들어가 거기 존재하던 것을 바라봤던 것처럼. 생각해 보면 그건 엄마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기도 했다. 엄마는 주제가 아닌 가장자리를 먼저, 더 오래 그렸고, 그리는 것보다 바라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가장자리에 있는 게 자꾸 눈에 들어와.”
엄마가 말했다.
작업실의 가장자리에는 사과, 꽃병, 접시가 놓인 테이블이 있었고, 엄마는 그것들을 그렸다. 엄마는 그 그림들이 연습용이라고 했다. 언젠가 진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엇을 연습했을까? 사과를? 꽃병을? 접시를?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이 찾아왔지만 이번에는 나 역시 핵심이 아닌 엄마의 방식대로 가장자리로 향한다. 기억의 가장자리, 거기에는 엄마가 그린 육각형의 사과가 있다.
“사과가 왜 이렇게 된 거야?”
나는 묻는다.
“빛이 닿는 곳을 그리고 싶었어. 사과가 빛에 반응해야 하잖아.”
엄마가 말한다.
“살아 있는 것은 빛에 반응하니까.”
엄마가 말한다.
“살아 있는 것 같지 않니?”
엄마가 묻는다.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엄마의 그림 속 사물들은 멈춰 있는 순간에도 빛에 반응하며 또 다른 빛의 파편을 만들었고, 그것은 죽어서 멈춘 것이 아닌 멈춘 순간에도 지속되는 삶, 엄마의 삶과 닮아 있었다.
엄마의 정물화는 어떤 판단도 분석도, 특별한 의미 부여도 필요하지 않았다. 연습용이었으니까. 가장 평범하고 작은 사물들을 그리기. 멈춘 것에서 살아 있는 순간을 발견하기. 아마도 그것이 거대한 세계로 뛰어드는 엄마만의 연습이 아니었을까.
화가가 되지 못했던 엄마가 그린 그림은 사실상 모두 연습에 불과했고, 그 연습 끝에 엄마가 완성한 진짜 작품은 연습했던 시간, 엄마의 인생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쓰는 글 역시 모두 연습이고, 이 연습 끝에 탄생하게 될 진짜 작품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 나의 인생이라는 것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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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엄마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어떤 이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무엇 때문에 그림을 멈췄는지 알 수 없다. 우리 사이에도 다 말하지 않는 것과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까. 그러나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우리를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하게 한다. 다 말하지 않지만, 다 말할 수 없지만 이해받고 싶고, 이해하고 싶으니까.
엄마의 마지막 그림은 체리나무였다. 내가 체리를 따며 찍었던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가지마다 열매가 무겁게 열린 벚나무, 엄마는 본 적 없는 그 나무를 그렸다. 6월의 빛과 붉은 눈송이 같은 체리가 떨어지는 그림이다. 엄마는 나를 생각하며 그렸다고 했지만 그 그림에 내가 있는 것 같진 않다. 다만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과 “살아 있는 것 같지 않니?”라고 묻는 엄마의 목소리가 있을 뿐.
엄마는 그 그림의 제목을 <체리 따던 날>이라고 지었고, 나는 거기에 <사랑을 연습하는 시간>이라는 부제를 달아본다.
엄마가 연습한 모든 것이 지금 여기, 내 앞에 있다.
* nature는 자연이라는 뜻이고 morte는 ‘죽은, 죽은 것 같은’이라는 뜻의 형용사다.
** 존 버거, 이브 버거, <어떤 그림: 존 버거와 이브 버거의 편지>, 신혜경 옮김, 열화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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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책장 앞을 서성이고, 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우고 이야기를 꿈꿨다. 산문집 <창문 너머 어렴풋이>, <몽카페>, <열다섯 번의 낮>과 <열다섯 번의 밤>을 썼고, 아니 에르노의 <세월>, <진정한 장소>를 비롯한 여러 책을 옮겼다.@malletshin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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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한샘
“전라도에 페미까지 대박이네요… 저는 믿고 거르겠습니다.”
책방을 열고 한 해가 막 지났을 무렵 한 일간지의 인터뷰에 응한 적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서 착안한 코너였는데, 나만의 방을 꾸려나가는 여성 자영업자들을 만나는 기획이라고 했다. 기사는 인터뷰어가 책방을 보고 느낀 내용과 질문으로 이루어졌다. 주요 질문이 책방을 어떤 책으로 채웠냐는 것이었기에 나는 책방을 구성하는 서가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곳들을 소개하며 설명했다. 여성의 삶과 페미니즘 도서가 놓인 서가, 세월호 참사와 제주 4·3사건, 광주 5·18 민주화 운동 등 잊지 말아야 할 시간과 역사에 대한 책들이 놓인 서가*, 그리고 노동, 인권, 환경에 대한 책이 놓인 서가에 대해. 질문은 페미니즘 서가가 책방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없냐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나는 테이블에 적힌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돌아서서 나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를 바꾸고 싶지는 않다고 답했다. 그렇게 말해서 욕을 먹었다. 이 작은 책방이 추구하는 세계를 설명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위 댓글은 그 기사에 달렸던 댓글 중 하나이고, 이후 달린 글들에 비하면 매우 점잖은 편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원색적인 욕이 섞인 댓글도 늘어났는데 내가 지닌 것이 ‘올바른 가치관의 페미니스트 성향’이라면 응원하겠다며 선심 쓰듯 달린 댓글도 있었다. 대체 ‘올바른’ 페미니스트 성향이 뭘까? 평등한 삶을 요구하는 일에 이치와 규범에서 벗어날 일이 무엇이 있길래 올바르기를 요구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악플이 달리는 속도는 점차 빨라졌고 이 일을 알게 된 동네 책방 운영자들과 책방의 손님들이 응원 댓글을 남기고 악플을 신고해 주셔서 욕이 섞인 댓글들은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다. 하지만 이 일은 내게 굵은 선을 남겼다. 두려움이라는 선.
우리는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물론 두려움을 느끼는 남자들도 있겠죠. 그래서요? 우리가 그 남자들을 위해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나요? 여자는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느끼며 살고 있어요. 엄마도 내가 어렸을 때 호신술을 가르쳐 줬잖아요. 기억나요? (중략)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말이죠, 남자는 명예를 잃을까 봐 두려워하지만 여자는 목숨을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는 거예요.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죽지는 않아요. 하지만 폭력으로는 죽어요.**
기사가 올라가고 악플이 달리기 시작하자 너무 두려웠다. 누군가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두려움이었다. 이름과 주소가 노출된 곳에 있다는 사실이 불안하고 힘들었다. 늦은 시간까지 심야 책방을 여는 날이면 긴장한 채로 있어 어깨 통증이 생겼고 어깨 통증이 잦아질수록 심야 책방을 여는 날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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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두려움도 있다. 책을 고를 때 느끼는 두려움이다. 책방을 연 후 소개하는 책들은 책방 이름을 달고 나가기에 나는 전보다 더 주저하게 되었고, 더 소심해졌다. 특히 구독자들에게 보내는 책을 선정할 때 굉장히 고심하게 된다. 내 기준으로 고른 책을 불특정 다수에게 보내는 건, 어떤 책을 읽고 좋았다고 개인 블로그에 올리던 시절과는 다른 무게의 책임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매년 4월이 그렇다. 4월에는, 4월만이라도 꼭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책을 추천하고 정기 구독 도서로 보내는데 실제로 초반에는 너무 무겁고 어두운 책을 보낸다며 구독 취소를 요청받은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겪은 후 구독 신청서에 어떤 책을 선정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넣었고, 이후로는 취소나 환불을 요청하는 구독자는 없었지만 위축된 마음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나는 또 왜 이런 책을 사 읽고 있는지, 모든 게 갑자기 혼란스러운 의문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겠다. 이 무슨 운명이고 또 어떤 음모인가?”***
나는 여전히 두렵다. 뭐 이런 책을 보냈냐는 말을 들을까 봐, 재미있는 책을 보낼 줄 알았는데 피곤하게 만든다고 하는 이가 있을까 봐 두렵다. 그럼에도 책방이 보내는 책의 리스트에 꼭 들어가야만 하는 책들이 있다고 믿는다. 책을 고른 마음을 꾹꾹 담아 편지를 쓴다. 사건의 바깥을 서성이는 인간으로 살지 말자고, 나쁜 역사에서 눈 돌린 공모자가 되지 말자고 쓴다. 설득하고 싶어진다. 그저 그것이 가장 쉬운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오에 겐자부로는 <히로시마 노트>에서 히로시마 피폭에 대해 침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은 피폭 피해자들이라 말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상실과 참사에 대해 침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은 희생자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진실을 밝히는 일에,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힘을 모으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그 일을 하는 데에는 때로 용기가 필요하기에 주저하게 되는데,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는 일이 필요한 용기를 얻는 것에 도움을 준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두려움이라는 선을 넘어 한 발짝 다가가는 일을 계속해서 시도한다. 책방 주인이라는 자리를 이용해 기획되고 의도된 운명과 음모를 봉투에 넣어 보낸다. 누군가는 봉투를 열고 답해올 것이라 확신하면서.
* 이후 이 서가에는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한 책들도 추가되었다. ** 카미유 로랑스, <여자>, 임명주 옮김, 1984BOOKS. *** 전규찬·박래군·한종선, <살아남은 아이>, 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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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원Q가 보내는 4월의 편지 (2022) ᅠ 지난 한 달도 잘 지내셨나요? 또 한 달이 지나 편지를 띄웁니다. 제겐 이번 3월이 유난히 스산하고 춥게 느껴졌어요. 날이 정말 예년보다 더 추운 건지, 저의 마음과 상황이 추운 건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어제 저는 오랜만에 산책을 다녀왔어요. 지난 며칠 동안 고질적인 위염과 두통으로 많이 아팠기에 기운은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걸어야 몸에 남아 있는 병의 기운을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해가 따뜻한 시간에 나갔더니 춥게 느껴지던 날들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어요. 아, 꽃도 많이 피었더라고요. 며칠 전만 해도 보이지 않던 새싹도 많이 보였고요. 꽃과 새싹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조금만 걸으려 했던 계획과는 달리 해가 떨어지기 직전에야 집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춥다고 제가 투덜대는 사이 그렇게 계절은 부지런히 바뀌고 있었더랍니다. 봄이 더디게 온 것이 아니라 제 마음이 서두른 것이었어요. 오늘은 쉬는 날이라 친구네 집에 갔었어요. 친구가 냉이된장국과 봄나물 비빔밥을 내어주더라고요.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어 오른손으로는 젓가락으로 나물을 살살 풀고 왼손으로는 숟가락으로 양념이 나물 사이사이에 고루 들어가게 비빈 후, 냉이된장국의 국물을 한 숟가락 넣어 촉촉하게 만들어 크게 한술 떠서 입에 넣으니, 와, 계절의 맛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더군요. 이렇게 4월은 완연한 봄을 연상시키며 노랗고 빨간 꽃, 연둣빛의 새싹, 풀내음이 묻어있는 기분 좋은 바람, 봄나물 같은 것들이 생각나는 달인데요, 4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April의 기원은 ‘열린’이라는 의미를 가진 Apertus에 is라는 형용사 어미가 붙은 Aprilis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하네요. 4월에는 꽃이 피기에 꽃의 개화를 뜻하는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요. 하지만 이렇게 예쁜 기원을 가진 이름의 4월은 우리에게 그저 아름다운 봄의 달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유독 애를 써서 기억해야 할 날이 많은 달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은 4월에 어떤 날이 떠오르시나요? 혹 떠오르는 날이 없다면, 4월의 책으로 받으신 이 책을 읽고 나면 마음에 어떤 날이 새롭게 들어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달에 보내는 다비드 그로스만의 책*은 지난 2016년에 출간되자마자 읽고는 품에서 한동안 내려놓지 못했던 책입니다. 그전에 이런 형식의 책을 읽어본 기억이 없었기에 완전히 새로운 형태를 가진 이 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제게 이 책은 한 장 한 장이 애도의 글로 읽혔고, 노래 같은 문장들은 곧 절규로 다가왔습니다. 작가는 무엇을 의도했을까요? 어떤 기억은 더 즐겁고 행복한 기억으로 덧입혀지기도 하고, 더러는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지기도 하지만, 어떤 기억은 절대 잊혀지지도, 대체되지도 않는다는 걸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우리는 작은 화면을 통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을 살아가며 그 편리함을 통해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을 모두 접하고 있지요. 전쟁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기도, 자유롭게 수면 위로 올라오는 혐오와 차별을 드러낸 말과 행동을 보기도 하면서요. 이 혼란한 세상에서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일들이 묻혀버릴까 봐 걱정이 됩니다. 리베카 솔닛은 자신의 책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를 통해 “구분한다는 것, 더욱 명확하게 보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저항이 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상황과 읽는 모든 것들을 명확하게 보고 진실을 가려내 거짓에 대항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이라고도 말하고요. 일상 속의 작은 순간에서 바뀐 계절을 찾아내시고, 따뜻한 마음을 발견하시고, 봄의 푸르름을 누리는 4월 맞이하시기 바랄게요. 그리고 그 소소하고 다정한 시간들 위에 잠시 멈추어 잊지 못하는 이들을 기억해 내시고, 잊지 않겠다 함께 다짐해 보면 어떨까요. 소중한 이를 잃으며 봄도 함께 잃은, 계절을 잃어버린 분들을 우리가 계속 기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거든요. 그렇게 우리의 최대의 저항을 찾아 나가기를 바랍니다. 지난 편지에 4월에는 안전한 세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를 바란다고 적었었는데요, 5월의 편지에는 정말 평화의 소식만이 가득하면 좋겠습니다. 다정한 마음을 담아,
서점원 Q 드림
* 다비드 그로스만, <시간 밖으로>, 김승욱 옮김, 책세상. 다비드 그로스만은 2006년, 이스라엘-레바논 전쟁에서 아들 유리가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2011년에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슬픔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시간 밖으로>를 발표했는데, 이 시적이고 아름다운 애가를 통해 그로스만은 잊히길 강요당하는 죽음들을 불러내 다 함께, 원없이 슬퍼하고 원없이 분노하고 원없이 미안해하는 데서 위로와 희망의 길을 모색한다.(출판사 책 소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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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31일 가정식 책방 ‘리브레리아Q’를 열었다. 이탈리아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지금은 책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다. 딸과 나눈 책 편지 《세상의 질문 앞에 우리는 마주 앉아》를 썼고, 그림책 《구름의 나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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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매일을 쌓는 마음] ‘윤혜은 X 고수리 작가의 일기와 쓰기’ 북토크 후기_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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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일락향 가득한 봄밤에 아름답고 다정한 공간 북티크에서 <매일을 쌓는 마음> 윤혜은 작가님의 두 번째 북토크가 열렸습니다. 첫 북토크의 미화리 작가님에 이어 이번에는 고수리 작가님이 사회를 봐주셨고요. 북토크 전날 수리 작가님께 미리 질문지를 받아보았는데 A4 네 장의 기나긴 러브레터여서 깜짝 놀랐답니다. 10년 가까이 쌓아온 시간 속에서 혜은 작가님과 수리 작가님의 발걸음이 꼭 닮아 있었고요. 일기와 에세이, 작사와 소설, 그리고 우정의 관계망까지, 그 애틋함 속에서 이야기는 깊게도 흘렀습니다. 분명 북토크인데 두 분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지요. [더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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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오후의 소묘 스튜디오(서울 은평구 응암동)
• 시간: 화-토 15:00~18:00 | 3시간 15,000원(다과 포함) • 신청하기: 네이버 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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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샘 신유진 두 분의 글이 쌍둥이 같아요. 글에도 쌍둥이가 있을 수 있겠죠? 한 작가의 다른 글은 일란성 쌍둥이가 되고 다른 작가들의 닮은 글은 이란성 쌍둥이가 되는 거죠. 두 작가님 모두 대면한 적은 없지만 글로, 책으로, SNS로 뵙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닮은 작가님들을 언제부턴가 제 마음 속 교집합으로 묶어두었나 봅니다. 빗소리와 함께 편지 읽으며 상실과 애도에 대해 생각합니다. “기뻤어”를 반복하면서 그날의 안도 속을 다시 여행하신 아버지도, ‘갈치속젓, 생활비’ 같은 단어로 인생 이야기를 쓰신 어머니도 애틋합니다. 갈치속젓이라는 단어가 쿰쿰한 냄새만 지닌 게 아니라 슬픔과 삶이라는 묵직함까지 담고 있었네요. 봄비 오는 날, 맑고 고요한 편지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_곽안나
안나 님이 적어주신 단어들에는 다정함과 애틋함이 가득하네요. 쌍둥이, 교집합, 봄비, 빗소리- 오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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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조용히 소식을 전해주시는 월간소묘에 감사해요. 이번 달 소묘의 소식 중 정한샘 작가님의 "읽는 순간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함과 동시에 몸으로 감각해 버린 비애의 공간. 나는 그냥 그 문장 안에 누워버렸다." 표현에 감동받고 갑니다. 저도 글로 표현하는 것을 연습해 보려고 합니다^^ _무명
그 문장에 누워주셨군요 :) 마음 표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습 조용히 응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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