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진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다.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들려주는 일화*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태어나서 가장 처음 본 사진은 어머니가 결혼 전에 찍은 흑백 사진이었다. 오래된 라디오 옆에 서 있는 여인(어머니)의 모습이 슬퍼 보여서, 어린 토카르추크는 어머니에게 슬픔의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대답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을 그리워하느라 슬퍼했다는 것. 토카르추크의 어머니는 그리워하면 그 사람이 거기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워하면 존재하게 되는 것. 그 말을 생각하면 건넌 방과 내가 들었던 모든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곳에서 내게 세계는 믿음으로만 존재했고, 그 믿음의 첫 번째 조건은 ‘있었다’였다. 우리가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를 기억해 보자. ‘옛날 옛적에 있었다, 살았다’로 시작하는 그 마법의 주문들. 오래전에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는 것들. 나는 엄마의 이야기로부터 ‘있다’의 세계를 향한 믿음을 키웠고, 그것은 내 글쓰기의 토대가 됐다.
*올가 토카르추크, 《다정한 서술자》, 최성은 옮김, 민음사, 2022.
사라진 것, 돌아오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있다’는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들을 쓴다. 그것을 위해 때로는 파헤치고, 부수고, 찢고, 다시 모으고 붙인다. ‘있음’의 근거 를 찾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믿기 위해, 말하기 위해. 얼마나 팠는지, 부수어버렸는지 망친 건 아닌지 헤아리다가 내가 서 있는 이곳이 폐허가 된 건 아닐까 덜컥 두려워질 때, 나는 그 옛날 건넌방으로 돌아간다. 단발머리 여자가 아기를 달래며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 곳으로. 거기에는 있다. 사라진 것, 돌아오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내게 희망이 되는 모든 것이.
나의 셰에라자드, 엄마의 이야기는 창조에 가까웠다. 이야기 속에서 엄마는 발견했고, 떠났고, 만들었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어땠을까? 엄마가 발견할 때, 나도 함께 발견했던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어 떤 날은 무너뜨렸다. 결코 한 시절 겪는 반항만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그건 내가 나만의 이야기를 짓는 방식이기도 했다. 창조가 아닌 재건. 나는 반드시 무너뜨려야 했고, 폐허와 혼란 속에서 내 것을 다시 골라내어 이어 붙여야 했다. 나는 엄마가 만든 이야기를 배턴처럼 받아 들고 계주를 이어가는 사람은 아니다. 아예 다른 곳으로 뛰어가길 원한다. 그러니 우리 사이에 주고받는 모든 것들은 계승이 아닌 연결에 가까울 것이다. 엄마를 쓰는 일, 엄마의 이야기를 옮기는 일은 한 방향의 선을 잇는 것이 아닌,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선을 이어 면을 만드는 일이다. 엄마와 내가 만든 그 ‘면’ 안에 타인을 초대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이야기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의 근원, 엄마와 내가 여성으로서 통과한 삶, 그리고 타자였다. 내게 가 장 가깝고 그래서 늘 멀어지는 엄마라는 타자와 내가 어떻게 연결되어 서로의 같음과 다름을 확인하는지, 서로 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함께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내 존재의 빈칸을 타인의 이야기, 그 안에 담긴 믿음으로 채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존재가 타자의 그리움에 대한 응답이라면, 나는 타자의 믿음으로 온전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누군가의 그리움과 슬픔을 기쁨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게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도, 내 삶도, 내 글도 존재해야 할 이유를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을 말하는 데 있어 ‘나’가 적절한 화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든다. 보르헤스의 말처럼 일인칭 화자는 사실을 생략하거나 왜곡할 수 있으며, 여러 가지 모순이 개입되어 소수의 사람에게만 잔혹하거나 진부한 현실로 전달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이 사실을 서술하는 작업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이 단 하나의 길과 문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 길과 문을 지나 좁은 길 하나를 더하고자 한다. 진실로 향하는 하나의 길. 물론 내가 만든 길이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다만 향하고 있을 뿐. 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믿고 싶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송병선 옮김, 민음사, 1994.
엄마의 이야기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내가 자라는 동안 이야기의 주어가 ‘나’에서 ‘엄마’로 바뀌었을 뿐. ‘엄 마가’, ‘엄마는’으로 시작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제 스물셋 여자는 영영 사라진 게 아닐까 서글프고 미안한 마음이 교차하지만, 그럴 때면 셰에라자드를 떠올린다. 셰에라자드는 이야기 속 모든 인물이었다.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았다. 다만 이야기가 됐다. 엄마도 그렇다. 자신을 잃지 않았다. 삶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엄마’라는 화자를 얻었을 뿐이다. 그렇게 엄마 자신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신유진 에세이 <사랑을 연습한 시간: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11월 출간 예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