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샀습니다. 처음으로.
대체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비를 맞고 다녔다는 것인가? 21세기에 삿갓 쓰고 도롱이를 걸친 게 아니라면 우산 없이 다닐 순 없었을 텐데, 혹시 늘 선물 받았다는 이야기인가? 궁금증을 해결하려면 먼저 우산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대체 우산이란 무엇일까요.
우산은 일상의 다른 소비재와는 조금 다른 특성이 있습니다. 먼저 공공재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분명 내 소유의 물건이 맞지만 언제까지 소유가 지속될지 알 수 없으며, 한 사람의 소유를 벗어난다고 해서 물건의 수명이 다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순환 시스템으로 귀속되어 자연스럽게 타인에게 소유가 이전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이 우산을 엄청나게 잃어버린다는 얘깁니다. 우산의 독특한 성질은 바로 이 분실의 순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산을 길 가다 잃어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반드시 일정 시간 머문 장소에서 분실하기 마련인데 그 공간들은 불특정 개인들이 교차하는 장소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버스, 택시, 지하철, 카페, 가게, 공방, 식당, (남의) 회사 등이 대표적이죠. 그러니까 우산은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두고 오는 물건에 가깝습니다. 어디에 있을지 알기 때문에 잃어버렸다고 할 순 없지만, 찾지 않거나 찾기를 포기할 뿐인 거죠.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상황도 똑같기 때문에 우산은 특정 장소에 계속 모이게 됩니다. 그러다가 훗날 비 오는 날에 우산들은 각자 자연스럽게 다른 이의 소유가 되어 다시 흩어집니다. "아휴, 갑자기 비가 오네." "여기 남는 우산 있으니까 쓰고 가요."
일반적인 소비재와 다른 우산의 두 번째 특성은 소유자가 구입 시기를 맘대로 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가 오는데 당장 집어들 우산이 없다, 바로 그때가 우산을 사야 할 때이며 그 순간을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 지구입니다. 물론 비가 오지 않음에도 우산을 살 수는 있습니다. 우산으로 유명한 나라에 여행을 갔다면 지금 당장 필요 없더라도 한두 개쯤 구입할 수도 있겠죠. 또는 마음에 드는 우산이 우연찮게도 SNS 피드에 광고로 떴다, 그러면 갑자기 지름신이 발동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렇게 소유자의 의지가 개입된 구매 행위는 지구적 기상 조건으로 인해 갑자기 우산을 사야 하는 사건에 비해 빈도가 훨씬 적을 것이라고 감히 예상해 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산을 사는 게 아니라 사실 강매당하고 있었다고. 제가 살아오면서 우산에 쓴 돈이 만만치는 않을 텐데 제대로 된 소비 행위를 통해 우산을 산 적은 한 번도 없었음을 얼마 전에야 깨달았습니다. 아, 비가 오지 않는 날에 우산을 사는 게 처음이구나.
그렇게 우산을 샀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산이 소중해졌습니다. 자다가도 우산이 생각나고 밖에 나가면 우산이 보고 싶고 언제 비가 오려나 하루에도 일기예보를 몇 번이나 보게 되고..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우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 우산은 존재감이라곤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TV 없이 오래 살았기에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습관이란 게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우산을 '챙긴다'라는 개념이 희박했습니다. 문을 열고 나설 때 비가 오지 않는다면 일단 그냥 나갑니다. 예상치 못한 비를 만나면 가까운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면 그만입니다. 그해 비가 아침에 자주 오느냐 저녁에 자주 오느냐에 따라 집이나 회사의 어느 한쪽에만 우산이 잔뜩 쌓이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우산이 없어 곤란했던 적은 거의 없었고 딱히 불편하지도 않았습니다. 우산은 대체적으로 늘 풍족했습니다. 우산에 정을 줄 일이 없었습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심지어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는 일개 물건이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생전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제품을 사기 위해 다양한 우산을 검색하고 비교하는 과정을 거쳤더니 그 위상이 달라졌습니다. 일기예보 화면에 빗방울만 묻어 있어도 꼬박꼬박 우산을 챙기게 되었습니다. 비에 젖은 우산을 대충 던져두지 않고 정성껏 말리게 되었습니다. 소중한 우산이 생겼습니다. 마음을 써서 제대로 물건을 산다는 게 중요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고작 2만 원도 안 하는 우산을 하나 샀을 뿐인데 말입니다.
돈을 주고 물건을 사서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일.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을 복기해 보면 당연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을 지불하지 않았는데 뭔가를 얻기도 하고, 돈을 내는 건지 아닌지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일도 있고, 돈을 냈지만 내 것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물건도 있고, (소유든 사용이든 간에) 물건의 가치와 상관없이 오직 구매 행위에서 쾌락을 느끼기고 하고.. 아무튼 자본주의가 복잡합니다. 제가 이 중에서 가장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공적인 서비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돈을 내지 않고 사용하면서 아무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는 '인터넷'입니다. 통신망에 비용을 지불하긴 하죠. 하지만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인터넷상의 각종 서비스는 (고유한 과금 시스템들이 있긴 하지만 기본 사용이 무료라는 점에서) 대부분 공짜입니다. 거의 모든 한국인이 사용하는 카카오톡, 유튜브, 네이버 등을 예로 들 수 있죠. 물론 이러한 서비스를 물건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을 겁니다. 당연히 다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