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혜영님 SNS 이름이 혜만사예요. 혜영이가 만난 사람들. 그걸 보고 저랑 비슷한 분일 거 같다고 생각했어요.
혜영: 예전부터 SNS에 특별하거나 잘난 모습을 전시하지 말아야지 생각했어요. 서로에 대한 박탈감을 느끼거나 심란한 마음이 생길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냥 오늘은 지하철을 탔다. 무엇을 먹었다 같은 소소한 내용을 보정 없이 올려보자 했어요. 단순히 사진 일기로써 어떤 내용을 기록할까 하다가 제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게 사람이었죠. 그래서 혜영이가 만난 사람들을 올려요. 오늘 우리도 같이 사진 찍어요.
김: 오늘의 혜만사는 저네요. 좋아요. 손목에 타투는 무슨 뜻이에요?
혜영: 현재, 즐거움, 사람 단어 세 가지예요. 방향을 잃었을 때 길잡이처럼 이 세 가지 가치를 중요시하며 결정하려고 해요. 어떤 행동을 하고 결정을 내릴 때 결국은 사람이 중심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상대를 위하다 보면 내가 나를 지우고 뒷전으로 만들 때가 많아요. 정작 내 주변은 잘 돌보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2022년에는 나에게 집중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싶어요. 가족들이나 주변 친구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요. 자비를 써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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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우리는 왜 방황할까요?
혜영: 글쎄요. 제가 올해 처음으로 심리 상담을 받기 시작했어요. 어느 순간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필요하다고 느껴져서요. 그 후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받아야 한다고 권장도 많이 해요. 저희 조합원들 같은 경우는 상담 비용을 지원해줄 테니 연초에 한 명씩 다녀오자고 했어요.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과 대화했을 때 알게 되는 나도 있고, 그게 중요하단 생각이 들어서요.
김: 맞아요. 말하면서 알게 되는 나도 정말 중요하죠. 우리는 계속해서 남들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가 봐요. 상담을 하게 되면 첫 질문이 뭐예요?
혜영: 이 상담에서 어떤 걸 원하는지 여쭤보세요. 어떤 이유로 찾아왔는지. 그때부터 이제 1시간 동안 울기 시작하는 거예요. 사실 심리적으로 무너졌을 때는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이 금방 나잖아요. 어느 정도 마음이 추슬러졌을 때 간 거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상담소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요. 은은한 조명에 따듯하고 의자도 편안하고.
김: 어디 한번 맘 편하게 울어봐라! 하는 분위기네요. 저는 스스로 지쳤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 울어요. 그런 분위기를 혼자 만들기도 하고요.
혜영: 감정에 솔직한 거 좋잖아요. 저는 반주를 한다든지 해서 해소를 하는데 (웃음) 마음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요새의 내 마음이 어떤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상대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고요. 동생들하고 일을 하다 보니까 그런 대화를 아직 어려워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나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타인의 반응에 대해 걱정을 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가 약간 주입식으로 계속 물어봐요.
김: 너무 좋은 리더인데요? 사람들은 주로 남이 보는 나를 엄청 신경 쓰잖아요. 저도 그럴 때가 많고요. 날이 갈수록 자아가 늘어나요.
혜영: 나이가 들수록 성격이 확실히 변하는 거 같아요. 저는 청소년 때 부끄러움이 많았거든요. 남 눈치도 많이 보고요. 첫 알바를 시작하고 나서야 조금 단호하게 화도 내보고 뻔뻔한 면도 생겼어요. 아,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 작가님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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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에는 작업실을 얻기 위해 각종 부동산 앱과 네이버 카페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락날락했다. 근처 재개발 지역의 새로 올린 건물들이 마음에 들어왔지만 세 달 정도 월세를 내면 주머니에 남는 게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관리비가 10만 원이 넘었다. 그사이 엄마는 단골 피부관리숍 건물 3층의 영어학원이 공실이라는 소식을 가져왔다. 영어학원이 이래서야 아이들이 공부가 될까 싶게 화려한 벽지들이 붙어 있었다. 그제야 옆 동네 건물의 비싼 관리비가 납득이 갔다. 깨끗한 계단과 엉덩이가 시리지 않을 화장실을 얻으려면 돈을 많이 내야 하지. 며칠 후 그곳에 짐을 풀었다.
어수선한 공간이 정리되는 동안 친구들은 동네에 아지트가 생긴 기념으로, 생일자를 축하해 줄 공간으로, 내가 자주 외로움을 타기 때문에 등의 이유로 거의 매일 찾아왔다. 한바탕 손님들을 맞이하고 난 작업실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다 짧은 집중력을 견디지 못해 의자를 빙그르르 돌렸다. 또 다른 의자가 눈에 띈다. 머리 닿는 부분이 살짝 해진 투박하고 커다란 가죽 의자. 엘리베이터가 익숙해진 손님들이 오랜만에 낡은 계단을 올라온 후 차지하고 싶어 하는 그 의자는 어쩐지 상담실 의자 같다. 혼자만의 공간을 얻자마자 가장 처음 중고거래 앱을 통해 산 고가구들의 서비스쯤으로 따라온 거였다.
문래동의 한 아파트에서 사방탁자를 꺼내오는데 주인분께서 나를 불러 세웠다.
아버지한테 사드렸던 건데 낡아 보여도 좋은 거예요. 한번 앉아보고 괜찮으면 같이 가져가요.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 푹신한 의자에 파묻혔다. 아저씨가 의자 옆 레버를 돌리자 이번엔 눕혀졌다. 여러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낯선 천장을 바라보다가 결국 가지고 왔다.
날씨가 크게 두 번 바뀌는 동안 많은 친구들이 그 낡은 의자에 기대 슬픈 날에는 울기도 하고 지친 날엔 짧은 잠을, 또 작은 한숨 같은 말들을 뱉고 가기도 했다. 가끔은 내가 먼저 연락해 앉혀 두었다. 불을 어둡게 낮추고 낮잠 잘 때 주로 듣는 의미 모를 외국 노래도 틀어주곤 했다. 내 어깨가 무거운 날 스스로 하는 행동이었는데 과거의 내가 부끄럽거나 미래의 내가 괜히 안쓰러운 날이 그랬다. 감정의 곡선이 위아래로 마구 요동치는 날에는 꼭 가까운 사람들에게 모난 말을 쏟아내는 나쁜 버릇이 있어 혼자인 편이 나았다. 혼자서 소모하고 스스로 치유하면 될 일이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크고 작은 속상함, 표정과 말들을 들어줄 품을 언제나 만들어 두었지만 반대로는 늘 어려웠다. 마음이 무거우니 몸도 무거운 것 같아 길 건너 병원에 도수 치료를 받으러 갔다. 바닥에 똑바로 누우면 꼬리뼈만이 몸을 지탱하는 것처럼 통증이 느껴져 오래 치료를 받은 터라 언제 방문해도 물리치료 선생님이 눈인사를 해주시는 곳이었다.
좁은 침대에 엎드려 익숙한 손놀림의 치료를 받는다. 뻣뻣하게 굳은 어깨와 등 전체의 뻐근한 통증은 그림을 그릴 때 몸에 힘을 주는 습관 때문인 듯했다. 선생님은 핸드폰 카메라를 켜 차렷 자세를 하고 앉은 내 어깨를 촬영했다.
거울로만 봐도 알겠지만 어깨가 엄청 비뚤어 있지? 우리 또 자주 봐야겠다! 그래도 걱정 마.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은 비뚤어져 있어.
차가운 고무 흡착기들을 등에 주렁주렁 달고 엎드려 다른 사람들의 어깨를 떠올렸다. 평소에 주의 깊게 보는 부위가 아니어서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기계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오늘 치료의 끝을 알렸다. 윗옷을 챙겨 입고 엉거주춤 침대에서 내려와 다시 작업실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 브이에게 전화가 왔다. 하루 걸러 연락하는 사이인데 매번 ‘별일 없지?’라고 묻는 애였다.
별일 없지? 별일이야 매일 있지. 지금 등에 페퍼로니 한가득 만들고 작업실 가고 있어. 페퍼로니? 피자? 아니. 저주파 치료 있잖아. 부황 같은데 찌릿찌릿한 거. 그림 그릴 때 자꾸 어깨에 힘을 줘서 귀까지 닿을 지경이야.
자주 통화를 해도 대부분 나는 시시콜콜한 별일이 많았지만 내가 브이에게 되묻는 일은 없었다. 물어도 아무 말 없이 웃을 게 뻔했다. 나의 오랜 연애가 끝나던 다음 날 브이는 여러 친구들이 다 함께 작업실에 온다는 것을 알고 그다음 날로 약속을 미뤘다. 이틀 내내 고장 난 것처럼 멀쩡하던 나는 브이가 나무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보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그애의 다정함에 기대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말했다. 브이는 매번 그런 식으로 들어주었다.
나와 예정에 없던 산책을 하다가 별안간 5년 전 잠시 연락이 안 되었을 때의 일을 말해주기도 했다. 그때로 돌아가 얘를 껴안아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생각하며 앞서 걷는 브이를 본다. 나만큼이나 어깨가 비뚤어져 있다. 몸에 힘을 준 시간들이 길었다 말해주는 것 같다. 한강으로 가는 길목에 멈춰 서서 오늘 병원에서 배워 온 스트레칭을 알려주기로 한다.
이렇게 손바닥을 벽에 붙여서 몸을 지탱하고…
브이와 헤어지고 돌아와 의자에 누워 낮잠을 잔다. 아까까지는 혼자였던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여기에 기대어있다 간 사람들이 떠오른다. 꼬리뼈 혼자서 지탱하기엔 내 몸이 가진 우여곡절의 곡선이 너무 많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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