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듣고 보고 하는 말이지만 근 한 달 집중적으로 접했습니다.
‘어렵다.’
오후의 소묘 그림책은 어렵다. 책이 어렵다. 사정이 어렵다. 출판계가 어렵다. 만나기 어렵다. 시국이 어렵다. 사는 게 어렵다…
연초부터 여러 어려움을 곱씹으며 입이 쓰기도 했습니다. 어려움은 영영 달아지지 않는 것인지. 그러나 한 가지 어려움 정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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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을 출간하고 유난히 자신의 감상을 의심하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이렇게 읽어도 되나요?
‘이렇게’가 무엇이든 제 대답은 하나랍니다. ‘물론이죠!’
<고결쥐> 읽기의 어려움은 어디에 기인할까요. 원전인 스페인 민담과 그것이 변주되며 축적되어 온 문화적 배경을 우리가 모른다는 것( *알고 싶다면 → instagram.com/p/CZE4doSvZR5/), 글과 그림이 조응하지 않는 것, 그림이 겹겹의 구조로 짜여 있다는 것, 전에 없던 스타일로 우리를 낯설고도 놀라게 한다는 것. 첫 번째 이유를 제외한 나머지는 책을 차근차근 다시 읽고 여러 번 반복해서 보면 요소들이 눈에 익으며 자연스레 구조를 파악하게 되고 이내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앞의 질문은 텍스트 자체의 어려움과는 별개로 어떤 현상을 드러내는 듯 보여요.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 주저하는 법을 배우며 자라왔다. 그리하여 창작자의 의도나 비평가의 답안을 모범으로 여기고, 미처 이해할 수 없는 건 자신의 무지 탓이라 꼬리를 내리는 유순한 관객이 되었다.” -목정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유순한 관객, 유순한 독자. 무엇을 보든 정답을 찾으려 하고 그 정답에 순응할 준비가 기꺼이 된 사람. 섣불리 제 감상을 발설하지 않는 사람. 이것은 너무나 저를 묘사하는 말이에요. 익숙지 않은 작품을 만날 때 그런 특성은 극대화되는데요. 현대미술작가인 박보나의 에세이에는 퍼포먼스, 영상, 조각, 그리고 예술인지 자연인지조차 혼란스러운, 장르를 규정하기 어려운 작업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낯설디낯선 작품들을 저자의 시선을 통해 문장과 이미지로 만나면서 그의 또렷한 관점과 넉넉한 비평을 지표로 삼아요. 그러나 박보나 작가는 손쉽게 정답을 내어주지는 않습니다. 그 또한 때로 다른 작가들이 마련한 어긋난 힌트들 사이에서 ‘미로’ 속에 빠지곤 하는걸요. 박보나 작가는 그 미로 속에서 넌지시 손을 내미는 듯합니다. 같이 헤매어보겠느냐고.
두 번째 미술 에세이 <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에서 조각가 정서영의 전시 ‘공기를 두드려서’를 다루며 “아름다운 형태를 눈앞에 두고 오랜만에 긴 추측과 고민을 하는 것이 즐겁다”라고 씁니다. 글을 읽어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는 그 아름다운 형태가 궁금해져 작품과 더불어 정서영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보게 됐는데요. 인터뷰 말미는, 작품을 보고 정답을 알고자 찾아온 제게 부러 들려주는 말 같았어요.
“작품을 보면서 사람들이 장벽을 마주하지 않기를 바라요. 의미를 말해주지 않으면 대개 장벽을 느끼는데, 의미를 바라는 것 자체가 장벽이라고 생각해요. 작품을 볼 때 그 누군가는 작품의 가장 중요한 목격자이고, 작품과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 자기 자신을 믿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무엇을 봤구나,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구나, 왜 기억하게 되는 걸까, 하고. 의미가 아니라, 작품이 구체적인 하나의 명확한 사실이라는 것, 그것을 내가 봤다라는 것, 거기서 출발했으면 해요.”
정서영 작가가 캐스팅한 호두 조각을 진열장에 가득 넣어둔 작품 <호두>(2020)와 호두 조각 두 알을 각각 10분 남짓 촬영한 비디오 작업 <세계>(2019)를 봅니다(비록 복제 이미지이나). 안희연 시인의 시가 문득 떠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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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언제나 단호하고 /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 / 한 손에 담길 만큼 작지만 / 우주를 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너의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흐르는 것일까 /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 어떤 위로도 구하지 않고 / 하나의 자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가졌다는 것 / 너는 무수한 말들이 적힌 백지를 내게 건넨다
-<호두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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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무수한 말들이 적힌 백지를 내게 건넨다”는 것. 우주 같은 백지를 장벽이 아닌 “작가가 넉넉하게 틔운 공간”(박보나)이라 여기며 그 안에서 실컷 숨 쉬고 헤매고 한껏 데워진 감각으로 무수한 말들을 상상하며 작품을, 세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읽어볼 수 있을지. ‘이렇게 읽어도 되나요?’라는 질문에서 ‘나는 이렇게 읽고 느꼈는데, 당신은 어떤가요?’로 이동해, 우리 함께 미로 속에서 손잡아볼 수 있을지.
당신이 느낀 당혹감, 분노, 해방감, 허탈함, 희망, 용기, 안도, 후회, 누군가는 통쾌함까지. 모두 옳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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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믿는 일로부터 다시 어려움에 대해.
“바라보는 일이 그저 매끄럽기만 하다면 생은 아프지도 아름답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때로 무언가에 막히고, 충격으로 아득해지고, 성찰의 거리를 취하고 다시금 용기와 다정으로 몰두하고, 기필코 뒤돌아 나 자신을 또한 응시함으로써 굳건해진다. 그리고 어떤 예술은 이 같은 시선의 아찔한 편력을 돕는다. …그 전율이 일으키는 파문은 또 얼마나 다채로운지.” -목정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그리하여 어떤 어려움, 그 아득함은 환희가 되고. 이 드물고도 귀한 체험을, 어려움을 어려워하지 말 것. 예술을 탐구해온 또 다른 비평가 올리비아 랭이 말했듯, “중요한 것은 …깨어 있고 열려 있는 것”이며.
ps. 2월의 두 번째 레터는 넷째 주 월요일인 28일, 연재로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