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쉽게 쓰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만큼 유달리 운을 떼기조차 어려웠던 적이 있었나 싶어요. 하기 싫은 일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루는 못된 습관이 있는데, 특히 보도자료 쓰기가 그렇답니다. 그런데 이번엔 마감일 전에 완성을 하고 말았어요. 전에 없던 일이지요. 레터 쓰기가 얼마나 싫었으면… 아니, 그러니까 그간 너무나 거대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오후의 소묘의 모토는 ‘일상의 작고 짙은 온기를 전한다’입니다만, 일상은 흔들린 지 오래고 어떤 곳에서는 심지어 뿌리째 뽑혔으며 작은 것들은 이제 무의미해 보이고 온기는 어느 곳에도 없는 듯 느껴지는 날들이에요.
그럼에도 일하고 읽고 듣고 또 고양이들을 쓰다듬으며 하루하루를, 저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하고 읽고 들은 것들을 힘내어 적어보기로 해요. 여러분은 하루는 어떤가요? 무엇을 읽고 듣고 이야기하셨나요?
어둠은 쉽게 물러나는 법이 없고 매번 다시 찾아오고 우리는 자주 지치고 힘을 잃고 우울하다. 그러나 완전히 그렇지는 않다. … 우울과 혼돈 속에서 질서를 잡아가면서, 먼 빛이든 가까운 빛이든 희미한 빛이든 내면의 빛이든 한 발 한 발 따라가면서. -정혜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
1_지난 화요일(8일)에는 CBS 방송국엘 다녀왔습니다. 12월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었는데요. 처음은 <당신이라는 수수께끼>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고유한 순간들>의 저자 김인 대표가 게스트로 섭외되어 동행했습니다. 이번엔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의 저자이자 오후의 소묘 그림책 다수를 번역한 무루 작가가 같은 프로그램에 섭외되어 또 동행하게 됐고요. <당신이라는 수수께끼>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겠죠. ‘2월의 편지’에 김인 대표 편 방송( 다시 듣기)을 전했으니 들으신 분들이라면 물론 아시겠지만, 정혜윤 피디가 만들고 황인찬 시인이 진행하는 인터뷰 방송이에요. 이렇게만 말하면 좀 부족한데. 정혜윤 피디의 책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서 이 프로그램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어요.
내 상상 속에서 방송은 이렇게 진행된다. 출연자가 ‘그것 없이는 자신을 말할 수 없는 단어’를 찾아내면 그다음 단계는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그 단어에 대해 말해보는 것이다. 나를 예로 들면 이렇다.
“… 저에게 ‘단어1’에 대해서 말하라는 것은 제 인생의 가장 큰 기쁨에 대해서 말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 ‘단어1’은 제가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놓았고 제 말을 바꿔놓았습니다. … 저는 ‘단어1’ 덕분에 삶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단어1’ 안에서 마음속에 불을 켜주는 이야기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단어는 전과 다른 새로운 의미를 지닌, 풀고 싶은 수수께끼가 된다.
수수께끼. 출연자는 자신의 소중한 단어 두 개에 대해 ‘스무 고개’하듯 진행자에게 수수께끼를 냅니다. 진행자는 출연자가 주는 힌트로 그 단어를 맞추(거나 못 맞추)고, 출연자는 그 단어가 자신에게 왜 소중한지 이어서 이야기 나눠요. 김인 대표의 두 가지 단어는 ‘향미’와 ‘침대’였고, 무루 작가의 두 가지 단어(역대급으로 어려운 수수께끼다! 못 맞추겠다!라는 절규를 남긴…)는 아직 방송 전이므로 공개하지 않을게요. 인용한 정혜윤 피디의 ‘단어1’은 무엇인지 짐작이 가시겠죠? 저 그리고 아마도 이 레터를 읽는 분들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일 것이에요.
2_지난 목요일(10일)에는 무루 작가가 진행자로 그림책 이야기를 하는 EBS 오디오 방송 <무루의 이로운 그림책> 최근 화를 들었습니다. 서두는 이렇게 시작해요.
저는 최근에 받은 어떤 질문 하나를 오래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단어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는데요. 아끼는 단어들을 하나씩 꺼내보며 여러 날 고민을 했습니다. 자주 쓰거나 아껴 쓰는 단어들에 대해서.
“누구라도 좋아할 것 같은 설명이 필요 없는 단어들”부터 “단어의 본래 뜻과는 달리 자기만의 의미가 부여된 단어들”까지 무루 작가가 소중히 여기는 단어 몇몇을 소개합니다. 이어서 “애초에 이 목록에는 절대 오를 일이 없는 단어들”도 언급해요. 그중 하나는 이번 방송인 33화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전쟁.
지난 화요일의 만남에서 저는 지금 전쟁 앞에서 다른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전쟁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라고 고민을 털어놓았어요. 무루님은 이미 고민을 뒤로하고 용기 있게 이 녹음을 마친 참이었지요.
포르투갈 시인인 조제 조르즈 레트리아가 글을 쓰고 그의 아들인 일러스트레이터 안드레 레트리아가 그린 <전쟁>은 국내에 2019년에 소개되었고 같은 해 무루님의 그림책 수업에서 함께 읽은 책이기도 해요. 그러나 지금 다시 펼치자 완전히 다른 감각으로 파고듭니다.
무루 작가가 소개하듯 <전쟁>은, 일반적인 그림책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일종의 문이자 경계” 역할을 하는 “속표지 없이 면지로부터” 그림 서사가 진행되어요. 거대한 거미, 뱀으로 보이는 검고 긴 것, 곤충들. 그들이 숲을 가로질러 검은 새 한 마리를 잠식하자 새는 날아오르고 글이 등장합니다.
전쟁은 빠르게 퍼지는 질병처럼 일상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전쟁은 듣지 않고, 보지 않고, 느끼지 않는다.
이 문장이 더 이상 전쟁에 관한 은유로만 보이지가 않죠. 이제는 더없이 적확한 묘사로 다가와 소름마저 끼칩니다. 문 없이 경계 없이 예고 없이 덮쳐오는 전염병, 그리고 전쟁. 우리 삶을 송두리째 뿌리 뽑는 두 가지 현실, 하나의 속성.푸틴은 COVID-19 이후 코로나 결벽증으로 극도의 거리두기를 지키며 지난 2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자신만의 성에서 자신만의 생각을 공고히 하며 전쟁을 계획했다고 해요. 그리고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자국민도 외부로부터 듣지 않고 보지 않도록 통제하고 있어요.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만을 선별해 유통시키고 진실은 불식시키기. 러시아 내에서 푸틴의 지지율이 높은 이유 중 하나겠지요. <전쟁>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악이라는 질병에 감염된 장군이 책들의 탑을 불사르는.
전쟁은 어떤 이야기도 용납하지 않는다.
3_ 내가 전쟁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세계에 점점 더 깊이 빨려들어가는 사이, 다른 것들은 모두 빛을 잃고 흐릿해지며 시들해졌다. 거대하고 무자비한 세계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전쟁이라는 수수께끼를 파고듭니다. 그의 책에서는 전쟁 생존 여성 수백 명의 고통이 터져 나옵니다. 그들은 전쟁에 직접 참전했고 전쟁을 목격했으나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했고 전쟁에서 그들의 존재 자체가 지워졌어요. 알렉시예비치는 이들의 목소리를 수집하는 작업을 행하면서 ‘하찮은 이야기 따위는 필요 없소… 우리의 위대한 승리에 대해 쓰시오…’라는 압박을 끊임없이 받습니다. 그러나 그 ‘하찮은 것’이야말로 ‘삶의 온기이자 빛’임을 믿고 여자들이 말하는 전쟁에, 고통에 귀 기울입니다. 참혹한 환경 속에서 소소한 일상을, 죽음에서조차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마는 그들의 언어를 날것으로 옮기고 전합니다.
<무루의 이로운 그림책>에서 무루 작가도 전쟁을 겪은 여러 목소리를 전합니다. 그림책 <전쟁>뿐 아니라 여러 책들을 다루고 있는데요. 그중 옛 유고슬라비아 생존 어린이들이 남긴 이야기를 모은 <나는 평화를 꿈꿔요>의 목소리에 유독 귀 기울이게 됩니다. 가장 약한 존재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꼭 들어달라는” 목소리, 간절히 “전쟁을 증언”하는 목소리에. 이들이 바라는 것은 공감이나 위로가 아니라 이 일이 끝나는 것, 되풀이되지 않는 것.
‘어떤 이야기도 용납하지 않는 거대하고 무자비한 세계’ 속에서도 이처럼 어떤 목소리들은 침묵을 뚫고 나와요.
정혜윤 피디는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서 실제 전쟁은 아니지만, 자기만의 전쟁을 치러낸 슬픈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그들 또한 “삶이 파괴되어봤기 때문에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미래가 변하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말합니다. “가장 좋은 모습으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정혜윤 피디는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소리를 들려달라 말합니다. “우리의 좋은 결말을 위해서 어떤 단어가 필요한지 찾아내면 정말 좋겠다”라고, 우리 각자가 “당신의 가장 멋진 점을 표현할 단어를 찾아내면 정말 좋겠다”라고. <당신이라는 수수께끼>라는 프로그램을 탄생시킨 이유겠지요.
우리가 언젠가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실컷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면 정말 좋겠다. 지금은 말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공허와 잔인함이 있지만 언젠가 우리의 말과 의미가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우리가 말을 공유하고 있다니, 그런 멋진 일이 있다니’라고 느낄 만한 이야기가 많아지면 정말 좋겠다.
전쟁, 정점을 모르고 일상을 흔드는 전염병, 산불이라는 인재, 혐오로 가득한 작은 전쟁과도 같았던 대선. 인간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더 나은 미래를 바라는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 수는 있겠습니다. 그 목소리를 듣자고 애써 말하는 이들의 아름다움을 또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소개한 책들과 두 방송에 저는 많이 기대었습니다. 그것은 안갯속 같은 날들에 퍼붓는 비, 폭풍, 천둥이었어요. 끝내는 빛이었고. 이날들에 다만 바랍니다. 각자의 내면에 새겨지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흔적 같은 단어”가 전쟁, 재난, 혐오 같은 단어가 되지 않기를. 거대한 그림자에 그늘져버린 저마다의 고유한 단어들에 다시 빛이 깃들기를. 우리가 ‘하찮은 것’(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아직은 이름 없는 것’(정혜윤),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왔던 것’(무루) 들을 지금보다 더 선명히 보고 들을 수 있기를.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 안에서 만나야 한다.
-
덧1. 정혜윤 피디의 소중한 ‘단어1’은 짐작하셨듯, ‘책’이고요. ‘책’은 다시 쓰면 ‘이야기’일 테죠. 무루 작가의 소중한 단어 두 가지도 곧 방송으로 만나기를 함께 기다려요. 당신의 단어들도 들려주시기를.
덧2. 레터 제목을 ‘구름의 나날'로 달아놓고, 분명 ‘구름의 나날’을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왜 이렇게 흘렀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보아하니 ‘이치코의 코스묘스'도 중구난방에 총체적 난국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