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걸 보라’고 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다. 가리키고, 빛을 밝히는 것. 하지만 우리의 주목을 요하는 건 이미 밝게 빛나며 손짓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목격하기 위해, 감성—존 버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는 법’—을 발전시킨다. 나긋나긋한 희망과 꿈, 기쁨, 취약함, 슬픔, 두려움, 갈망, 욕망을—인간은 저마다 하나의 풍경이다. … ‘저걸 봐.’ 인간의 위기를, 누적된 평범한 축복을, 혹은 견딜 수 없는 상실을. 그리고 여전한 한 줄기 햇살을, 빨래하는 여자를, 도살된 소를. 우리를 붙드는 삶을. 우리가 아는 삶을. —대니 샤피로 <계속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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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 소녀는 이끼 숲에 살아”
이달 출간 예정인 김선진 작가의 그림책 [버섯 소녀]의 작은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전에는 큰 심상 없이 읽은 한 문장이 각별하게 다가왔어요. 버섯 소녀가 태어나고 살고 또 떠난 곳을 새삼 그려보게 됐습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전시 오픈 날에 비단이끼, 서리이끼, 꼬리이끼, 깃털이끼, 털깃털이끼, 나무이끼를 심고 있지 뭐예요. 다녀가신 분들은 이끼 숲(?)의 버섯 소녀를 보셨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끼와 버섯이 이다지도 친한 건 무슨 연유일까요. 꽃도 씨앗도 없는 이끼는 잎과 줄기의 구분이 모호하고 관다발도 없어서 물기가 많은 축축하고 그늘진 곳, 바위 틈, 고목에서 자라는 1에서 10센티미터 사이의 작고 부드러운 식물입니다. 버섯은 식물도 동물도 아닌 균류지요. 다양한 생태가 있지만 대개 생물의 사체에서 양분을 얻어 사는 ‘부생腐生’ (때로는 기생) 생활을 하기 때문에 이끼처럼 역시 고목이나 부엽토, 그늘진 곳에서 자란다고 해요. 국어사전과 위키백과를 짜깁기한 이 서술을 김선진 작가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생을 다한 숲의 곤충들은 고목 아래에서 날갯짓을 멈추고 쉬었어 소녀는 그 오래된 나무 곁에서 태어났어
한 번의 밤은 고목의 나뭇잎을 덮고 두 번의 밤엔 고목 아래 곤충들이 썩은 날개를 내어주었지
아름답다는 말을 아니할 수 없겠죠. 무루 작가는 EBS 팟캐스트 <무루의 이로운 그림책>에서 [버섯 소녀]에 대해 “무척 기묘한 판타지인 동시에 매우 과학적인 이야기”라고 소개하기도 했어요. “이야기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무척 중요한 방식일” 거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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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가 쏟아진 다음 날, 산책길에서 어제는 보지 못했던 동그랗고 하얀 버섯을 만났습니다. 반나절의 햇볕은 뜨거웠고 돌아오는 길에 그 버섯은 사라지고 없었어요.
[버섯 소녀]의 에필로그에는 이야기의 시작점이 적혀 있어요. 나타났다 사라진 버섯. 무엇에 홀린 걸까, 그게 아니라면 버섯은 어디로 갔을까. 그것을 이해해보려, 찰나의 만남과 신비에 골똘한 작가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의 초기 드로잉과 더미북을 거쳐 지금의 책에 이르기까지 작업 과정을 살펴보면, 처음엔 환각버섯을 먹은 양 어둠으로 가득했던 이야기가 어떤 특이점을 거쳐 지금의 말갛고 투명한 세계로 변모해요. 첫 구상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은 작가 자신으로 보여요. 안갯속에 빠져 있던 ‘나’가 타자인 ‘버섯들’로부터 자기를 따먹으라는 시끄러운 호소를 듣고 그 버섯들을 취하면서 자아가 분열 혹은 복제됩니다. 나는 다른 ‘나들’에게 떠밀려 어디론가 떨어지고 땅에 박혀 버섯이 되어버려요. 그리고 또 나른 ‘나’가 버섯이 된 ‘나’ 앞에 나타납니다.(전시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세상에 나오게 된 이야기는 ‘버섯 소녀’가 주인공이에요.(물론 버섯 소녀도 작가의 페르소나일 수 있겠죠.) 버섯 소녀의 태어남과 사라짐을, 그사이의 여정을, 관찰자처럼 찬찬히 또 담담히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버섯 소녀가 저녁 노을을 바라보는 것을 함께 보고, 먼 곳에서 온 새로부터 듣는 것을 함께 듣고, 꽃밭이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을 함께 바라면서요. 전복이라 할 만한 크나큰 변화에 대해 작가께 물었더니, 초기 구상의 더미북을 만들고 원화 작업에서 첫 그림을 완성하자마자 장르의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답하셨어요. 그 그림 속에서 버섯 소녀들(애초에는 ‘나와 나들’)은 마치 유니콘 같은 말 위에 앉아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나의 다른 자아들과 화해하지 못한 채 불편한 동승을 하고 있던(끝내 추락으로 이어지는) 호러의 장면이, 사라진 줄만 알았던 버섯 소녀가 친구들과 함께 나타나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는 판타지의 장면으로 맥락을 달리한 것이에요. 이 과정에는 어떤 신비가 작동한 것일까요.(다음 편에, 아마도…)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났다 사라진 버섯을 두고서 이야기는 나에서 버섯으로, 분열된 자아에 대한 탄식에서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한 송가로, 불화의 발화에서 관찰의 이해로, ‘먼저 가 있어’에서 ‘먼저 가서 기다릴게’로, 안개에서 이끼로, 부생腐生에서 부생復生(다시 삶)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이전의 것을 모두 버린 것은 아니에요. 맥락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였지만, 초기 작업의 많은 장면들이 지금의 책에도 남아 이야기를 겹겹으로 두껍게 만들어줍니다. 버섯 소녀를 감싸준 ‘고목의 나뭇잎’처럼, 죽은 ‘곤충의 날개’처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있게 한 이끼처럼. 그야말로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네요. 그러니 사라진다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변신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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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무루 작가의 말을 이어서 들어봐요. “어차피 다 사라져버릴 텐데 무슨 소용일까, 라는 생각 혹은 태도의 가장 먼 곳에 사라진 것들이 먼저 가서 존재하는 세계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장소를 상상하는 일은 끝내 흘러가버린 것들이 실은 전부임을 아는 것이기도 하겠죠. 가만히 들여다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거나 기록하고 이야기로 만드는 일이 새삼 무척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야기로 만드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사라진 것들의 세계로 먼저 가서 기다리는 사람인가 싶어집니다. 우리에게도 어서 오라고, 이 세계를 보자고. 그 곁으로 가서 사라짐을 지금 봐요. 사라진 것들이 먼저 가서 존재하는 세계를 목격해요. 사라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만히 느끼고 생각하고 함께 이야기해요. 유년을, 떠나버린 사랑하는 존재들을, 신비를, 구름을, 사랑을, 모험하는 마음을, 어젯밤의 나를, 지난달의 우리를, 내일 사라질지도 모를 종들을, 별들을, 춤을,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을, 멀고도 가까운 곳으로부터의 이야기들을,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것들을.
덧. 저는 이끼를 볼게요. 그 속에서 버섯 소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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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그리고 버섯과 이끼의 문장들
‘잔나비걸상’은 담자균류 민주름버섯목 불로초과의 버섯 이름이다. 텔레비전에서 이 버섯을 처음 보던 날,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어쩜 저렇게 이름부터 모양까지 희한한 버섯이 있담. 게다가 불로초라니! 세상엔 많고 많은 생명체가 있다지만 특히나 버섯은 너무나도 신비로운 존재 같다. 사실은 ‘균’의 일종이라는 것, 이따금 독을 품고 있다는 것, 죽은 나무에서도 잘 자란다는 것도 모두 다 신비의 세목들이다. … 잔나비는 원숭이이고 걸상은 의자를 뜻하는 말이니까 ‘원숭이가 잠시 앉았다 갈 만한 의자’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일까? 하기는 생긴 게 의자처럼 판판하기는 하다. 버섯 도감에서도 이 버섯의 형태를 반원, 낮은 산, 발굽에 묘사하는 걸 보면. … 체계가 있든 없든 설명이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름은 그 자신의 비밀을 품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 잔나비걸상은 자신의 이름이 잔나비걸상이라는 것에 만족할까. 이해할까. 아무려나 잔나비걸상은 나에게 하나의 상징으로 남을 것 같다. 그 기원을 상상할수록 더더욱 신비로워지는 미지로서.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더욱더 놀라워지는 이름 그 자체로서. —안희연 <단어의 집> ‘잔나비걸상’ 중에서
초키가 환각버섯 다섯 개를 가져왔다. 첫 번째는 사슴뿔같이 생긴 붉은색 버섯이었다. 두 번째는 악마의 손톱 세 개가 붙어 있었다. 세 번째는 흰색 버섯 모양으로 윤기가 흘렀다. 네 번째는 침대 밑에 뭉쳐 있는 먼지덩어리에 검은색 후추를 친 것 같았다. 다섯 번째는 검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들을 프라이팬에 올렸다. 트러플 기름을 붓고 센 불로 볶기 시작했다. 다섯 번째 버섯이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고 사슴뿔은 검게 변했다. 나머지는 기름에 젖어 먹음직스러웠다. 우리는 어제 배달시킨 카레에 버섯을 올려서 먹었다. … 지금은 일단 쉬고 이 버섯이 끝나면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초키가 소파에 완전히 뻗어서 점점 소파 밑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그가 소파 밑으로 스며들 때마다 그를 건져 올렸다. 나중에는 놔두었다가 바닥에 흐른 그를 걸레로 몇 번 닦았다. … 우체부는 모자를 눌러쓰며 인사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편지를 뜯었다. 사랑하는 아빠에게, 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초키에게 돌아가는 대신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 밖으로 새들이 줄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고민형 <엄청난 속도로 사랑하는> ‘초키의 연료’ 중에서
베란다에 조금씩 식물이 들어차게 된 것은,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받아온 방울토마토 모종을 심으면서부터였다. … 빨갛게 토마토가 익어갈 때 아이는 햇빛처럼 밝게 산란하는 목소리로 엄마, 이거 봐 우리 따먹을 수 있겠다 이거 내가 가져온 거지? 방울방울 웃었다. 애플 민트는 문지르면 사과 냄새가 난단다. 엄마 이거 봐 예쁘지, 여기 꽃에 묻어 있는 건 꿀 같은데 찍어 먹어볼까? 이끼가 구름 같아, 예쁘니까 파가지고 가 기르자, 엄마. … 기르는 일은, 돌아보고, 대답하고, 얼마나 컸는지 커서 휘청거리지는 않는지 날마다 알아보고, 더운지 아픈지 무서운지 차가운지 감지하는 일이다. 그럴 때 어떤 마음이 되는지, 자기도 잘 모르겠는 마음을 꺼내어 말할 수 있도록, 시간과 눈길을 천천히 쏟으며 기다려야 하는 일이다. —<어린이의 마음으로>, 하재연, ‘이끼가 구름 같아, 엄마’ 중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엄마의 구식 재봉틀이 의식 위로 떠오른 건 방송에 소개된 어느 핀란드인 가족을 통해서였다. 핀란드 북부 발티모 숲에서 십수 년째 자급자족 중인 가족의 보금자리는 눈으로 덮인 깊은 침엽수림 한가운데 놓여 있다. 라세 씨와 마리아 씨, 이들의 두 자녀로 구성된 가족은 손에서 시작해 손으로 끝나는 생활을 영위한다. … 휴지 대신 질 좋은 이끼를 사용해 뒷일을 처리하는 화장실 사용법은 시청률을 겨냥한 하이라이트 장면처럼 등장하지만 어디까지나 관찰자의 시선일 뿐 다섯 살 유스투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낡았지만 깨끗하게 관리된 세간살이와 선반장의 말린 버섯들, 몸에 잘 맞게끔 늘어진 스웨터, 찬 공기를 덥히는 난롯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나는 내내 심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자급자족 라이프에 대해서라면 더 이상의 환상도 로망도 없는 데다 결정적으로 나는 스스로가 영 미덥지 못하다. … 그러자 지금껏 수백 수천 번 같은 질문을 받아왔다는 듯 화면 속 라세 씨가 입을 연다. “양말부터 꿰매보세요.” —송은정 <비건 베이킹> ‘양말부터 꿰매보세요’ 중에서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이끼가 되고 싶어. 밑거름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 정선에서 사람들 장례 치르고 이장을 많이 했어.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가. 너그럽게 산 사람들이 죽어서도 미소 짓고 있어. … 죽는 건 흙으로 돌아가는 거야. 꽃이 되니까 헛산 건 아니야. 열매도 되고 나무도 되니까. 기뻐, 기뻐, 항상 기뻐.” -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혹은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까워서 사람을 보지 못한다. 세상이 축소해서 못 보고 지나치는 사람도 많다. … 나는 이런 사람을 크게 그리고 싶었다. 모두가 쳐다보는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 사유를 자극하는 사람들.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가는 일 자체로 모두의 해방에 기여하는 사람들.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들. —은유 <크게 그린 사람>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 김용현’과 ‘책 머리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