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턱을 넘는 일은 언제나 떨리고 피하고만 싶다. 내가 머물고 애정하던 세계와 작별을 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함께 어울려 살던 사람들, 자주 다니던 아지트, 좋아하는 곳에서 먹은 음식, 냄새와 공기, 무엇보다 그 순간을 거쳐온 기억들… 이 모든 걸 두고 떠난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먹먹한 그리움이 몰려온다. 새로운 시절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면, 나는 문턱을 넘지 못한 채 머뭇거리며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런 내게 파니 뒤카세의 그림책 <레몬 타르트와 홍차와 별들>은 문턱을 넘어 보라고 부드럽게 등을 떠밀어준다. 주인공 무스텔라는 작은 마법사를 따라 자신이 살던 안전지대를 벗어나며 인생 첫 모험을 떠난다. 그런 무스텔라 앞에 ‘온갖 낯선 것이 불쑥 불쑥 나타나 놀래겠지.’라 예상한 것과 달리, 본디 자신의 일상에서 함께하던 쉐리코코와 할머니가 등장한다. 너무나도 친숙한 존재가 별안간 나타나자 픽 웃음이 나왔다. ‘새로운 세계에 오더라도 이전의 세계가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구나.’라는 안도감이 들며, 나는 낡고 푹신한 내 침대에 드러누운 것 같았다.
‘문’이란 이전의 세계와 단절하는 ‘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두 공간을 쉽게 가로지를 수 있는 틈의 공간일지도. 문을 열고 새로운 시절로 넘어가기 두려운 순간에, 때때로 이 책을 다시 펼쳐보고 싶다. ‘문을 넘어도 완전한 끝은 아냐. 우리도 그곳에 함께 갈 거니까.’라고 속삭이며 문턱을 넘을 용기를 줄 테니까. 쉐리코코와 할머니가 무스텔라의 모험에 자연스레 동참한 것처럼, 소중했던 기억이 문틈으로 스며들어 새로운 세계에서 나와 함께하리라는 가능성을 믿어보게 된다.
구월의 첫 수요일에 ‘월간소묘: 살롱’ 첫 모임을 가졌습니다. ‘문턱 너머’라는 주제로 [곰들의 정원]과 [레몬 타르트와 홍차와 별들]을 같이 읽고, ’문턱’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기억의 문턱’ 너머에 펼쳐지는 풍경, 처음으로 ‘낯선 문’을 열어본 경험, 내가 아는 ‘세상의 끝’에 자리한 문 등등… 책이 던져준 질문들 속에서 서로의 유년과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깊이 이야기 나눴어요. 그 끝에 탄생한 글 한 편을 구월의 두 번째 편지로 전합니다. 여러분도 이 질문들에 답해보며 자신만의 단어를 촘촘히 이어가 보시길 바라요 :)
완성된 글은 아니지만 남겨주신 후기도 전해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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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절이 끝나고 다른 시절로 넘어갈 때 넘었던 문턱들을 생각했다. 열 살에 무릎 세워 바라보던 창문, 서울로 올라올 때의 기차역, 현불사 오르던 비 오는 밤. 시절 마디마다 뚜렷하게 남아 있는 나의 나이테. 요즘 겪는 일련의 일들은 굵고 명료한 선보단 넓고 울퉁불통하고 흐려서 구분이 어렵지만 지나고 나면 선명해지려나. (…)
‘월간소묘: 살롱’에서는 달에 한 번씩 오후의 소묘의 책을 같이 읽고 이야기 나누며 한 편의 글이 될 단상을 갈무리합니다.
첫 주제였던 ‘문턱 너머’에 이어 두 번째 주제는 ‘마음의 지도’입니다. 클라우지우 테바스가 글을 쓰고 비올레타 로피스가 그림을 그린 <마음의 지도>와 출간 예정 에세이 <우울이라 쓰지 않고>를 읽고 이야기 나눕니다.(미리 읽어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 마음의 지형들을 찬찬히 또 새롭게 살펴보고 함께 그려내는 시간 가져요.
“화려하고 장식적인 요소로 가득 채우면서도, 톤 다운된 색조와 무표정한 등장인물들의 세련된 매무새를 버무려 과하지 않게 툭하니 내어놓는 솜씨에 반해서 나홀로 좋아했던 파니 뒤카세. <레몬 타르트와 홍차와 별들>은 파니 뒤카세의 몽환적이고 사랑스러운 매력이 한껏 담긴 작품이다. 읽는 내내 참말로 행복.” _littlehome_nayeon
“이야기는 구름 위를 가볍게 건너가듯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거기로 펼쳐진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글자들을 따라 페이지를 넘겼다. 가만히 멈추어 살펴보게 되는 그림들. 파니 뒤카세는 나를 오직 그 페이지에 몰입하도록 내버려 둔다. … 느닷없이 즐겁다. 두 손 가득 기쁨을 얻은 것처럼.” _moajium_
“온종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그 자체로 엄청난 모험이지 않을까. 온종일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모험일 수도 있고.” _소소듬뿍
“호수: 이 책은 그래서? 같은 책이야. 흥미진진한데 뚱딴지 같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귀여워. 그래서 자꾸만 그래서?라고 묻게 되는 책이야. 그래 그거다 엄마!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서 일백이천 번 보고 싶은 책.” _lakeangie
“한바탕 레몬빛 꿈을 꾼 것만 같은 느낌! 이야기 전체를 아우르는 레몬빛 노랑색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 오묘한 색감을 더해 이야기 끝에 다다라서는 마치 레몬 타르트를 한 입 베어문 것 같은 상큼하고 달콤한 여운을 남겨요.” _joli._.yul
“노란 스포트라이트가 켜진 표지에 반했는데, 달콤 상큼한 향이 나는 예쁜 그림들이 가득해서 더욱 매력적인 그림책이었다. 익숙하고 평범한 일상을 떠나, 새롭고 신비스러운 모험의 세계로 인도하는 이야기에 몰입되어 주인공을 따라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아름다운 상상력이 세밀하고 귀여운 그림체로 그려져 액자에 담아놓고 싶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해 용기 있게 떠나면 어떤 놀라운 일들이 펼쳐질까!” _jeydaylife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새큼한 레몬 맛 이야기가 준비도 없이 펼쳐지는데 그 개연성 없이 마구 던져지는 이야기가 나는 그냥 막- 좋다. 있는 그대로를 유쾌하게 보아주며 ‘함께'한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_witheredfruits
“욕조에 담긴 몸이 살짝 떠 부유하는 기분을 느끼며 논리적인 이성의 세계가 아닌 황당한 상상의 이야기를 즐기는 무스텔라 덕분에 잊었던 어떤 도약과 일탈을 다시 회복하는 기분.” _wingtoywing
레터 속 "유지가 아니라 매번 새로이 고쳐 쓰는 것"이라는 문장 덕분에 여름 내내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어요. 이따금 고개를 드는, 미워하는 마음을 너무 미워하지만은 않아야겠어요. :-)
_옹심이네집
전해주신 마지막 문장을 저도 새롭게 새깁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너무 미워하지 않기. 불편했던 여름과 잘 작별하고 새 가을 우리 기쁘게 맞아요.(’옹심’이라는 두 글자만 보고도 눈이 하트가 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