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가는 저녁을 지켜보는 사람처럼 글을 읽어나갈 때마다 아쉬워했다”
고수리 작가 (〈마음 쓰는 밤〉 저자)
문이영의 글은 언제나 어스름을 향해 걷는다. 이 근면한 산책자이자 끈기 있는 기록가는 짐작건대, 낮볕에 일렁이는 볕뉘 같은 사람. 저녁볕에 그림자가 자라는 사람. 어두워진 밤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 푸른 새벽을 가로질러 걸어 나가는 사람. 그리하여 저물거나 밝아오는 어스름의 시간을 걷는 사람. 그는 우울이라 쓰지 않고, 우울을 걸어보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었으므로, 나는 그를 따라 발맘발맘 걸었다.
우리는 떠나온 자리를 돌아다니며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야기를 주웠다. 타인의 곁을 맴돌며 가장 연약한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기억의 가장자리를 애써 겉돌며 나란히 걸어보았다. 삼청동의 산책로, 초가을의 시장, 여름의 계곡, 겨울의 옥상, 명동 가는 버스, 유월의 을지로, 일요일의 서점, 봄의 교정, 겨울의 동네에 다다를 때까지. 아주 오래 걸었을 때, 무언가 달라진 걸 깨달았다. 이미 지나갔거나 벌써 당도해 버린 계절감을 느꼈다. 뒤처져서 초조하고 따라가지 못해 어둑해진 마음의 기분. 그때 옅은 우울이 휘 지나가며 알려주었다. 여기,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느끼는 이 마음이 무엇인지. 한 마디 이름을 지어 이것이 마음이라고 읽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시절 기억을 톺아보며 이것이 마음이라고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문이영은 후자와 같은 사람이라서, 그 마음을 다 읽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렇기에 더욱이 그를 신뢰하며 따라 읽었다.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이 맑아졌을 땐, 나도 어스름의 시간에 서 있었다. 우울에 우울 말고 다른 것들이 있었다. 이 마음은 저무는 걸까 밝아오는 걸까. 이 마음을 걸어 나가면 한밤일까 아침일까. 읽어본 사람만이 답할 수 있다.
한편, 나는 저물어가는 저녁을 지켜보는 사람처럼 글을 읽어나갈 때마다 아쉬워했다. 멈춰 서는 문장마다 내 마음 같아서. 작가의 글을 그저 오래도록 읽고 싶어서. 어쩔 도리 없이 문이영의 글을 기다리고 기대하게 되었다. 몸에 지닌 이야기를 처음으로 써낸 작가는, 저물거나 밝아오는 하루처럼, 지나가거나 다가오는 계절처럼, 내내 성실하게 글을 쓸 것이다. 그런 굳건한 믿음이 있다. 기다리지 않는대도 문이영의 글은 언제고 나에게 올 테지만, 나는 구태여 기다리고 싶다. 몇 번이고 그의 책을 열어 기쁘게 읽어보기를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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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옳다, 걷다 보면 사랑하게 된다. 우울의 동쪽과 서쪽을, 남쪽과 북쪽을”
신유진 작가 (〈창문 너머 어렴풋이〉 저자)
때마침 햇빛이 좋은 계절이다. 문이영처럼 햇밤을 한 바구니 사 들고 걸어본다. 걷는 일은 그가 장소를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걷다 보니 문득 그가 궁금해진다. 지금 이곳을 그가 걷는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아니 혹시 우리가 언젠가 마주치진 않았을까. 그러다 책 속의 그 길과 비슷한 풍경이 나오면 무릎을 치며 말한다. 아, 나는 어쩌면 그를 알 것도 같다고. 그러니까 그는 태양에 경의를 표하면서 생명력을 흠뻑 감각하고, 나무를 보며 계절을 세고, 멀리까지 갔다가도 어린 시절의 파란 대문 앞으로 자주 돌아오는, 벗어날 수 없는 곳이라면 차라리 사랑해 버리는 사람. 문이영의 글을 읽으면 그와 나란히 걷는 기분이다. 그의 문장은 나와 보폭이 비슷한 사람의 옆모습 같아서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면 그의 풍경이 나의 것이 되고, 그의 표정이 나의 풍경이 된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을 그는 우울이라 부른다지. 그는 오래 걸었던 사람답게 그 마음의 지형을 내게 알려주고, 나는 때로는 익숙하고 때로는 낯선 그의 우울을 거닐며 내 것을 그려본다. 그가 옳다, 걷다 보면 사랑하게 된다. 우울의 동쪽과 서쪽을, 남쪽과 북쪽을, 아무도 해치지 않는 이야기를 많이 아는, 그런 이야기를 햇밤처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의 마음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