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에는 막이 끝날 때마다 소년이 등장한다.
50년 가까이 계속되는 고도에 대한 기다림이 전부인 이 이야기에서 오늘의 기다림도 실패로 끝남을 전하러 오는 소년. 하지만 내일은 꼭 온다는 희망을 함께 전하는 소년. 어떤 이들은 그 소년을 양치기 소년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내게 그의 의미는 고도를 본 유일한 사람, 방금까지도 그의 곁에 있었던, 그래서 살아 있는 그의 말을 담아 온 전령이었다. 흰 옷을 입고 나타나 나를 다시 살게 하는 언어를 전하는 전령 말이다.
아이가 생겼다.
겨울에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솜을 덧댄 도톰한 배냇저고리를 만들었다. 서툰 바느질에 손이 찔리자 배 속의 아이가 함께 움찔거렸다. 핏줄로 연결되어 있는 또 다른 육체, 나의 통증이 전달하는 호르몬을 감지하는 또 다른 몸을 느끼는 일은 정말이지 신비로웠다. 이해나 동감 같은 것에서 오는 것과는 다른, 좀 더 명료한 신비였다.
신비롭다는 감정은 언제나 진실에 닿고자 하는 절박함에 응답하듯 온다. 신비는 환상과 가까이 있고 진실은 사실을 품고 있어서 이 둘은 원래 멀리 있는데 어느 날들의 간절함이 등불이 되어 그 길을 마중 간다.
사랑이라는 진실, 언제부터인가 사랑이라는 단어는 이 생에 어서 가져야만 하는, 하지만 애써 구해도 결국 닿지 않는 목적지 같았다. 어릴 적부터 들어온 하나님의 사랑이 이 단어의 품을 너무 크게 만든 것일까.
사랑이라고 불리기에 적합한 상황과 조건은 언제나 부족했다. 늘 빈 구멍을 메꿀 해석이 필요하고 계산은 너무 쉽게 들키곤 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려고 할 때마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저 깊숙한 데서 누군가 선연한 얼굴로 말하는 듯했다. 나는 그를 미워하면서도 내심 미더워했다. 그가 얼굴을 드러내면 스스로 생채기를 내서라도 없애고 싶다가도 보이지 않을 때면 불안했다.
배가 불러오고 밤새 꿈이 잦아졌다.
어느 날의 꿈에선 탁자 밑에서 꿈틀대는 커다란 뱀을 보았다. 뱀은 자신을 알아차리자 나를 쫓기 시작했고 난 그를 피해 뛰어가 다른 방문을 잠갔다. 하지만 뱀은 이내 물과 같은 액체로 변해 문 밑으로까지 새어 들어왔다. 미끄럽고 축축했다.
아이가 태어났다. 남자아이였다.
예정일이 일주일 지났는데도 아이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양수는 줄어들어 갔다. 유도제를 맞으며 이틀을 기다렸다. 의사는 아이가 나올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한다며 내 자궁 문을 할퀴었다. 그때마다 온 신경은 자지러졌지만 몸의 문은 꼼짝하지 않았다.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대 위로 벗겨진 몸은 부끄러웠고 척추의 뼈마디 사이로 들어가는 마취제의 온도는 차가웠다. 얼마 되지 않아 내 몸이 흔들리면서 아이가 나왔다. 기다린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빠른 수술이었다.
응애- 하며 무엇이 목에 걸린 듯 크지도 않은 소리로 몇 번 울었다. 피와 물로 젖은 아이가 내 곁에서 잠시 머물렀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자 뜨지 않은 눈으로 나를 더듬어 찾았다.
“원래 이렇게 울고 마는 것이 맞나요?” 첫 울음이 짧아 걱정이 되었다.
“괜찮아요. 정상입니다.” 돌아온 대답에 안심했다. 순한 아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2017년 1월 21일.
정오가 막 지나던 무렵, 하늘은 조용히 어둑했다. 병원 창밖으로는 전례 없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덩이들은 공기에 조용히 저항하며 제 몸에 가해진 중력의 이끌림만큼, 그만큼의 속도로만 천천히 내렸다. 처음으로 폐와 심장에 이 세상의 공기를 넣었다 빼는, 갓 태어난 아기의 빠른 숨소리를 들었다. 모두 하늘에서 방금 내려온 것들, 따뜻한 신의 품에 있다 막 온 것들의 몸짓이었다. 아직 그의 온기를 뺏기지 않은 채 내게 왔다. 바람에 날리지 않은 채, 비에 흐려지지 않은 채, 방금 빻은 쌀가루 같이 깨끗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내 곁에 왔다.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것이 수증기를 내뿜었다.
젖을 먹는 아이의 숨소리, 유축기의 바람이 빠지는 소리, 오래된 가구가 삐걱대는 소리, 가느다란 초침의 소리… 시리도록 순수한 백색의 노래와 함께,
괜찮다. 괜찮다.
그저 잠잠하여라.
하늘이 아니라 땅으로 내려 보낼 것이니.
풍성한 만나를 너에게 내려 보낼 것이니.
나의 전령과 함께 온 노래로 다섯 평 남짓한 회복실은 위로의 포만감으로 가득 찼다.
이제 나는 이 삶을 더욱 오래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