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 작가 김혜영의 에세이 화집 <조용함을 듣는 일>의 한 꼭지를 전합니다. 3월 25일 막을 내린 동명의 전시 팸플릿에 작가노트로 실린 글이기도 하지요. <조용함을 듣는 일>의 표지는 바닷가에 의자 하나가 놓인 그림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 뒤표지에는 막이 내린 커튼 앞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지요. 의자에서는 식물이 자라나고 있어요. 나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당신의 이야기로 나아가는, 마침내 우리의 이야기로 자라나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글이에요. 다정한 겹 더해지길 바라며.
작은 슈퍼 뒤 문을 열면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방이 하나 있는 작은 집이 있었다. 그 집 딸은 여섯 살 때 생일 선물로 받은 커다란 공주의 집에도 방이 하나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사는 다른 집들도 이런 모습일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그 집은 슈퍼까지 있으니 퍽 멋있게 느껴졌다.
어느 날 아빠는 주차장과 방 사이의 벽을 허물고 잠깐의 공사 끝에 주차장을 방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더 큰 하나의 방이 있는 집이 되었다. 아무리 방이 넓어졌대도 결국은 하나의 공간이라 숨을 공간이 없었다. 엄마에게 혼나고 나면 장롱과 바닥 사이의 작은 틈에 얼굴을 처박고 울던 기억이 있다. 나는 꽤 자주 혼났기 때문에 우는 내 엉덩이를 가족들에게 자주 보여야 했다.
아빠는 대개 슈퍼 카운터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훔치는 동네 아이들을 몇 번이나 놓칠 만큼 깊은 잠을 잤다. 엄마는 남은 회사 일을 처리하거나 부엌일을 했다. 오빠와 나는 방에서 티비를 보거나 엎드려서 낙서를 했다. 그렇게 집은 가족들이 어떤 얼굴로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한눈에 보이는 공간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칠 무렵 우리는 이사를 왔고, 슈퍼 집의 방만 했던 공간이 내게 생겼다. 그리고 더 이상 가족이 무얼 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는 없었다.
그 무렵 나는 도넛 모양의 나무 책상과 휙휙 돌아가는 의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그랗게 뚫린 책상의 한가운데에 들어가 얕지만 아주 여러 가지인 취미 활동들을 늘어놓고 싶었다. 그때 내 관심사는 줄에 구슬을 끼워 조잡한 액세서리를 만들거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자르고 붙이는 것들이었다.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여도 손에 끼우면 따가운 비즈 반지를 내밀면 엄마는 벌건 광대를 올리며 웃었고 아빠는 ‘우리 딸은 뭔가 될 거 같다’고 말해줬다. 사실 아빠 말은 신빙성이 없었다. 그는 내가 한 달 남짓 발레를 배웠다 치면 김 발레, 글쓰기 학원에 다니면 김 작가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작은 이름들이 좋았다. 반면 거의 연년생인 오빠는 매번 10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와 칭찬을 받았다. 내가 신발주머니에 대충 넣어 온 ‘한자 외우기 왕’ 상장 등으로 받는 칭찬보다 멋져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무렵부터 자신을 너무나 잘 알았다. 산만하고 집중력이 부족해 끈기 있게 할 수 있는 일이 몇 없었고, 게다가 생각도 많았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진 개미굴처럼 많은 생각의 방을 만들었다. 기억력이 안 좋은 나는 그것들을 금방 까먹을 게 분명했고 아까운 마음에 자주 그림으로 남겨뒀다.
<선잠에서 깬 후엔 새벽 산책을>, 2020. 천에 동양화 물감, 유채, 91X91cm.
상상 속에서 여러 시공간을 헤맨 후 마지막에는 꼭 아무것도 없는 빈터를 떠올렸다. 이내 그곳에 집이 지어지기도 했다. 외딴 바닷가에 홀로 선 집. 타닥타닥 연기를 내는 마음이 물결 소리에 묻히는 곳. 그곳을 화판에 옮겨 그렸다. 강한 색감이나 시원한 붓질도 좋지만 눈에 편안히 닿는 색과 느린 붓질이 주는 잔잔한 여운이 더 마음에 들어왔다.
그림은 언어의 역할도 했다. 친구들에게 내가 겪은 엄청나지만 또 보잘것없는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종이와 볼펜을 챙겼다. 말로도 충분했겠지만 그걸 꼭 그림으로 그려서 친구에게 들이밀었다. 상대가 충분히 이해했다는 듯 끄덕거리면 그제야 만족스럽게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어느 날에는 대화를 나누다가 자연스레 상대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가 얼마만큼의 위로를 바랄까 생각했다. 친구가 먼 산을 보며 이야기하면 나도 어딘가 먼 곳을 봤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친구는 안아줬다. 그 후에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 잘 알고 자신을 돌보는 그 애들에 대해 생각했다. 자기를 가엽게 여기길 바라며 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말하는 것이 가지는 힘이 얼마나 큰지 궁금했다. 말하고 듣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게 했다. 생각으로 한 번, 말하면서 또 한 번, 들으면서 다시 한 번.
그림이 한 점 두 점 완성될 때마다 나에 대해 생각하다가 타인에 대해 생각하며 붓을 내려놨다. 나는 이런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이야기해 왔는데, 이제는 다른 이야기들이 궁금했다. 그림 속 풍경을 본 또 다른 이가 들려줄 이야기들이. 하나의 그림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쌓일 수 있을까.
각기 다른 삶에서 나오는 것들이 다정한 겹을 만들어줄 듯했다. 벽에 그림을 걸고 한 발짝 뒤로 나온다. 팔을 X 자로 만들어 스스로를 안으며 생각한다.
《곰들의 정원》, 《레몬 타르트와 홍차와 별들》 파니 뒤카세가 그린 세상 모든 해방을 위한 꿈과 환상의 경이로운 밤 “그제야 나는 우리가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지 깨달았지. 바로 해방 작전이었어.” — 이야기 속의 밤은 어느 낮보다도 환하고 반짝거린다. 파타무아를 따라나선 아이가 사뿐사뿐 누비는 밤의 세상은 아름다운 공감각적 심상으로 가득 차 있다. 열기구가 되어 날아오르는 음표들, 다르랑다르랑 코를 고는 나뭇잎들,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색색의 한숨들…. 부루퉁한 얼굴로 뿌옇게 맞는 흑백의 아침 대신 간밤의 모험을 기억하며 설레는 알록달록한 아침이 되기를. ‘세상 모든’ 길 위에 저마다의 이야기로 가득한 그림자를 만들어가기를. —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