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자리 말고, 별자리 운세 보는 것을 좋아한다. 태양이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12개의 별자리를 관측하는 것이 아니다. 고대 인류가 하늘이 분명 인간에게 하는 말이 있으리란 믿음으로 다소 억지스럽게 이름 붙인 별자리로부터 매일, 매주, 매달, 매년 인간의 운명을 추측하는 운세 보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밤하늘에 대한 남다른 감상은 있을지언정 아무리 깨끗한 밤하늘이 내 머리 위에 펼쳐져 있어도 그 흔한 북두칠성 하나를 제대로 잇지 못한다.
밤하늘의 별 대신, 흰 화면 위에 떠 있는 별이라면 몇 초 만에 발견할 수 있다. 매일, 매주, 매달, 매년 착실히 도착하고 있는 포춘 메시지, 별자리 운세다. 나는 친구가 ‘이게 북두칠성이야’ 일러주면 ‘아아 진짜?’ 하고서 눈을 크게 뜨며 사진을 찍듯이 ‘이것이 너의 운세야’라고 확신하는 메시지를 조금의 의심 없이 스크린 캡처로 간직한다.
같은 날짜를 점치는 운세여도 플랫폼마다 비슷한 듯 다르게 전달되는 별자리 운세가 어떤 시스템을 통해 도출되는 것인지는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다.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는 운세를 내가 알게 되는 것, 그로 인해 나의 운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순간이 좋은 거니까. 경고나 불운을 이야기하는 메시지 앞에서도 이건 내 운세가 아니야!라고 부정하기보다 그것마저 운의 일부로 취급하고 넘어가는 유연함도 유독 운세 앞에서만 발동되곤 한다. 운세가 좋으면 물론 기분이 좋지만, 내내 운세를 곱씹으며 행운의 구체적인 결실을 기대하는 편인가 하면 또 아니다.
별자리 운세는 뭐랄까, 아주 짧고 재미있는 소설 같다. 내 생각엔 별자리 운세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점성술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점괘의 타율보단 아무래도 남다른 스토리텔링 덕분인 것 같다. 나처럼 별자리 운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테지.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낭만적인 확신과 현명한 조언을 체득한 미래에 나를 잠시 투영하는 것, 그렇게 잠시 잠깐 변화를 마주할 주인공이 되어보는 것. 예컨대 “로맨틱한 순간들로 가득한 한 주, 영화 속에서나 봤을 법한 만남을 기대할 수 있겠네요”라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설렘부터 “이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파헤쳐 볼 용기가 샘솟는 시기, 그로 인해 다 같이 행복해지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와 같은 비장한 응원까지 장르가 다채롭다. 무시무시한 예언으로 나를 얼어붙게 할 때도 마찬가지다. 딱히 호의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은 채 마주할 하루에 얼마간의 긴장을 불어넣어 주는 것도 운세의 역할이니까. 팍팍한 일상에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짜릿한 읽을거리를 주는 것으로 별자리 운세는 그 소임을 다한다. 그러나 내게는 내심 어떤 믿음이 있다. 운세를 계속 보는 것이야말로 나의 운을 쌓는 일이라고. 복권을 구매해야만 복권에 당첨될 기회가 주어지듯 말이다.
별자리 운세를 향한 나의 끈질기고 지속적인 애정은 소설을 읽는 것으로 소설 쓰기와 가까워지고 있다 믿었던 시절과 닮아 있다. 정작 잘 쓰지는 않으면서, 지금은 그저 읽고 또 읽는 노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사실 이십 대에는 소설을 쓰려는 마음을 가능한 한 피하고 싶었다. 끝까지 쓸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간혹 쓰게 되어도 ‘나는 절대로 이 소설을 마칠 수 없다’는 불안으로 간신히 마침표를 찍은 경험뿐이었다. 그런데도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소설 쓰는 마음이 의아했다. 한 줄도 쓰지 않으면 영영 사라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편했다. 딱히 오기랄 것도 없이, 쓰지 않는 삶에 금세 익숙해졌다. 나는 일기라면 모를까, 소설을 못 쓰면 죽을 것 같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안 쓰면 안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애매한 재능을 확인시키는 아킬레스건이었다가 차츰 꿈꾸기를 면제받는 초라한 훈장이 되었다.
그런데 꼭 몇 년에 한 번씩 쓰는 마음이—이럴 때야말로 오기를 부리듯—일어나곤 했다. 기진맥진하게 쓰고 나면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에 생색을 내고 싶었다. 썼다? 결국 쓴 거다? 도대체 누구한테…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소설 읽는 마음이 아닐까. 처음 소설을 읽기 시작한 이래로, 소설 읽기를 멈춘 적은 없으니까. 아주 느리고 미약하게나마 쓰는 운을 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소설을 쓰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이유를 물은 적도, 의미를 찾은 적도 없지만. 계속,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을 만큼 간헐적인 시도뿐이지만, 그저 ‘나도 쓰고 싶다’라는 마음과 눈이 마주친 뒤로는 그 순간으로부터 결코 멀어지지 못하는 자신으로 반복해서 돌아올 뿐이었다.
그런 지지부진한 시간을 지겹도록 반복한 끝에, 이제는 ‘다시’ 소설 쓰는 나로 돌아오는 간극이 현저히 짧아진 것을 느낀다. 처음으로 마지못해 쓰는 것이 아니라 쓰고 싶은 것이 분명히 생겨나서 쓰는 기분을 느꼈다. 시작이 간절했고, 과정에 몰두했다. 끝까지 갈 수 있을지 없을지를 걱정하는 것보다 지금 붙잡고 있는 소설과 함께하는 시간을 잘 보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끝에 다다랐다. 끝이구나. 느낌표 없이 소설의 끝을 오래 바라봤다. 웬일로 끝으로부터 후다닥 도망가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끝나도 되나? 끝을 좀 더 미룰 수는 없나? 고민하다 결국 여기가 끝이구나 인정하게 되는 소설 쓰기의 경험이 무척 소중했다. 끝이 아쉬울 때,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마주할 수 있는 끝이 눈앞의 것이 전부일 때, 내 선택지는 다음 소설로 넘어가는 것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2년 동안 두 편의 장편과 한 편의 단편 소설을 썼다. 그리고 도입부에서 멈춘 이야기가 두세 개 정도 있다. 이 중 운이 좋게도 계약과 연재의 기회를 얻은 이야기도 있다. 소설을 조금 더 촘촘한 간격으로 쓰게 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구체적인 성취보다도, 지나간 시간을 달리 해석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소설 쓰는 운을 쌓고 있었다고. 이번에는 소설을 쓴 오늘의 나 대신, 오늘을 기다려온 무수한 어제들의 내가 생색을 내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쌓는 마음은 기다리는 마음과 닮아 있다. 단, 기다린다는 감각 없이 기다린다는 점에서 무심하고, 그러므로 가만 기다리고만 있지 않을 거란 점에서 부지런하다. 오늘 출근길에도 별자리 운세를 확인했다. 어디 보자…. “정성껏 조정할 수 있는 하루. 하나하나 착실히 작은 부분에서부터 쌓아 올리며 전진합니다.” 꼭 연작소설의 일부분을 공유받은 것 같다. 내가 별자리 운세를 신뢰한다 말하지 않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운세의 배턴을 이어 받듯 매일을 살고, 소설을 쓴다. 하루와 내 글의 마침표는 나 스스로 찍어야 하니까. 이제야 겨우 살수록 ‘사는 운’이, 쓸수록 ‘쓰는 운’이 쌓인다는 걸 알겠다. 결국 별자리 운세와 소설 읽기는 내가 얻고 싶은 행운들의 마중물 같은 건지도 모른다.
요즘은 스스로 질문을 던지지 않고서는 쌓을 수 없는 것들 앞에 있다. 쓰는 몸을 만드는 것 말고 무엇에 몰입하고 싶은지. 문장을 잘 쓰는 것 말고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통과하고 싶은지. 내 소설이 이 세상의 어디를 경유했으면 하는지, 어떤 인물이 나를 대신해 소설 속에서 살고 사랑하며 영혼을 만들어나갈 것인지. 나에게 포춘 메시지를 보내듯 전송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냥 ‘소설’이란 장르를 써보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의 궤를 그릴 수 있는 소설가이고 싶어서다. 먼 훗날 나의 대답들을 이으면,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별자리가 될 거라는 기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