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샘, 신유진 두 작가님이 긴 겨울방학을 마치고 더욱 깊어진 이야기로 돌아왔습니다. 한샘 작가님은 아버지의 말을, 유진 작가님은 어머니의 글을, 그렇게 서로 다른 말과 글을 살았던 시간을 나눠주셨어요. 모래처럼 깔려 있는 애통함 위로 새로이 써 나가는 글자들을 전합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두 번째 시간을 살기 위해서”, 그러니까 “타인의 말을 다시 살아보기 위한 것”이라는 유진 작가님의 문장을 빌려 질문을 던져보고요. 여러분이 다시 살아보고자 하는 타인의 말은 무엇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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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한샘
상실을 겪고 있는 친구에게 선물할 책을 추천해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어떤 책을 권했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뭘 안다고. 누군가를 잃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 대체 뭘 안다고 책을 골라 추천했을까. 그때와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 마음을 짐작만 하던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아픔을 감히 모르고 책을 고르던 때로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늘 생각하며 살았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이별이 찾아온다면 스페인의 시인인 안토니오 갈라의 시처럼 ‘다 끝났다’고 말하는 대신 ‘다시 시작하자’라고 말해보겠다고 쓴 적도 있다. 상상해 보는 죽음의 대상은 나 자신인 때가 가장 많았고 점차 나와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존재들로 옮겨 가곤 했다. 마치 진짜처럼 느껴져 고통을 느낀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이후를 생각해 보았던가. 다시 시작하자고 말해보겠다니,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고 쓴 글이었다. 그 끝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면 남겨진 영혼은 절대 웃을 수 없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이후의 삶.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바로 지금 살아내고 있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수 없고 읽을 수도 없다. 읽을 수 없으므로 쓰기를 멈춘다. 병과 죽음, 남겨짐과 애도를 빼고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아주 사소한 기억들이 갑자기 몸을 부풀리는 순간이 있다. 주로 후회로 연결되는 기억들이다.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결정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면 그냥 운다. 엄마의 눈을 보면 많이 울어 진물이 난다는 것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있다. 이 삶은 도착하기 전에는 몰랐던 삶이다. 이곳은 너무 낯설고, 낯선 만큼 비현실적이고, 그래서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을 끌어안고 내가 도착한 장소는 슬프고 서러운 곳, 비애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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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는 그곳에 다다르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장소였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걸 예상하지만 (알지만), 상상한 죽음 직후 며칠이나 몇 주가 지난 다음의 삶이 어떠할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 며칠이나 몇 주도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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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된 이전 번역본으로 조앤 디디온의 <상실>을 읽었을 때 이 문장은 타인의 문장이었다. 그때의 나는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진심으로 느껴본 적은 없는 상태였기에 그저 읽었고, 공감하는 문장이 나오면 밑줄을 긋고 인덱스를 붙였다. 좋아하는 저널리스트가 상실을 겪고 쓴 완벽한 애도의 문학으로 읽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겪은 상실 이후 새로 나온 번역본을 펼쳤을 때 이 문장은 더 이상 타인의 문장이 아니었다. 읽는 순간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함과 동시에 몸으로 감각해 버린 비애의 공간. 나는 그냥 그 문장 안에 누워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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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문장 속으로 들어가 몸을 눕힌 순간 다시 읽고 싶다는 열망이 찾아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위로와 치유에 관한 글이 아니라 죽음과 질병에 관한 글, 내가 아프거나, 나와 가장 가까운 이가 아팠던 이야기를 읽고 또 읽는다. 돌봄의 주체가 된 이야기와 간병의 어려움을 적은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는다. 어떤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나고 어떤 이야기는 삶으로 다시 돌아온다. 삶의 마지막과, 되찾은 삶의 사이에서 나는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지닌 인간이 된다. 내 일처럼 슬프고 내 일처럼 기쁘다가 분노가 일기도, 질투가 생기기도 한다. 그렇게 형편없어진 마음으로 뒹굴대다 보면 꾸역꾸역 하루가 살아진다. 책장 위에 세워둔 영정 사진 앞에 서서 이게 진짜냐고, 이렇게 갑자기, 한 사람이 사랑하는 이들의 세계에서 영영 사라져 버릴 수가 있는 거냐고 묻고 바로 돌아선다. 사라져 버린 이는 대답할 수 없기에.
‘코로나로 너희가 무너져 내렸을 때 마음이 너무 아팠어.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한다는 게 너무 속상했어.’ 떠나기 전날 호흡기를 단 채 이 말을 하던 아빠는 ‘너무 속상했어’를 말할 때 뼈가 드러난 가슴을 탕탕 쳤다. ‘그런데 한샘이 네가 책방을 열고 그렇게 꾸리는 걸 보면서 와아 정말 대단하다, 대단하다 했지. 너무 기뻤어. 너무 기뻤어. 너무 기뻤어.’ ‘기뻤다고요?’ ‘그래, 기뻤어.’ 말을 한 걸 잊은 것처럼 계속 반복한 말. ‘기뻤어. 기뻤어. 기뻤어.’
그리하여 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기뻤다는 말이 비애의 공간에서 굴러다니던 나를 매일 아침 새롭게 일으킨다. 책을 고르고, 책을 보내고, 책을 채우고 비우는 일을 다시 한다. 마음을 살피는 이들의 사려 깊은 다정함도 덥석덥석 받는다. 그가 기뻤다고 했으므로, 그곳에서 나도 기쁘고자 한다.
나는 지금 작고 노란 책방 안에 나만의 애도의 벽을 느리게 쌓고 있다. 책 한 권이 벽돌 한 장이라 생각하며 쌓는다. 내가 읽는 책들이 쌓여 벽이 되면, 그때쯤 되면 슬픔과 서러움의 공간에서 천천히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동안>(유디트 바니스텐달 지음, 김주경 옮김, 바람북스)에서 재인용. **조앤 디디온, <상실>, 홍한별 옮김, 책읽는 수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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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31일 가정식 책방 ‘리브레리아Q’를 열었다. 이탈리아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지금은 책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다. 딸과 나눈 책 편지 《세상의 질문 앞에 우리는 마주 앉아》를 썼고, 그림책 《구름의 나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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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유진
소바주sauvage, ‘야생의, 거친’이란 뜻을 담은 이 단어는 여전히 남성성을 상징할까? 티브이를 보다가 조니 뎁과 눈이 마주친 순간 궁금해졌다. 사막에서 조니 뎁이 기타를 거칠게 연주하자 늑대들이 깨어난다. 늑대들은 조니 뎁과 나란히 걷는다. 남성용 향수, 소바주 광고의 한 장면이다. 소바주의 향기란 뭘까? 늑대 냄새? 남자 냄새? 내게는 어려운 클리셰다. 나의 소바주에는 조니 뎁과 늑대가 없다. 내게 행운처럼 찾아왔던 몇 권의 책들이 남긴 위업이다. 클리셰를 거부하기, 클리셰에 질문하기, 클리셰를 지우기. 지운 자리에는 반드시 무언가를 다시 써 본다. 오직 연필로.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옛 유행가가 있는데,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지워야 하니까 연필로 써야 한단다. 내가 믿는 진실도 그렇다. 언젠가는 고쳐지고 지워져야 한다. 연필로 쓴 나의 진실은 유약하고 불완전하나 자유롭다. 박제되길, 문장 안에 갇히길 거부한다. 근육이나 타투는 없지만 자잘한 상처는 있다. 그 진실은 사막보다 더 큰 위험이 도사리는 글자의 세계에서 늑대보다 더 사나운 자기 비하와 자기 위안 그보다 더 무서운 비대한 자아를 경계하며 나아간다. 나의 이 연약한 진실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 또한 소바주가 아닐까. 클리셰를 지운 자리에 소바주를 다시 써본다.
나의 첫 번째 소바주는 글자들이었다. 어느 오후, 엄마가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유리 탁자 위에 맨발을 올리고, 수화기를 들고 중얼거리며 전단지나 전화번호부, 메모지에 반복적으로 적었던, 언뜻 보면 무의미한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는 말들을 담았던 글자들. 밑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짙어지는 볼펜의 두께, 네모 칸, 네모 칸 속 또 다른 네모 칸, 힘을 주어 그린 빗금이 지운 말들. 무엇이었을까? 긴박하게 또는 사납게 적어 내려간 그 단어들은.
엄마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수화기를 다시 내려놓고, 발을 올렸던 유리 탁자를 마른걸레로 훔치고, 각을 맞춰 정리한 물건들 사이에 낙서를 숨기고 떠나면, 나는 그 자리에 엄마처럼 비스듬히 앉아 숨겨진 것들을 들춰냈다. 전화번호 모서리에 적힌 ‘갈치속젓’, 전단지에 빗금으로 지운 ‘생활비’ 그리고 ‘글 쓰는 여자’, 네모 칸을 그린 후에 그 안에 가둔 ‘삶’이라는 글자, 또 몇 번이나 고쳐 쓴 ‘잘못된 건 아닐까?’라는 문장. 나는 그 글자들의 조련사가 되고 싶었다. 비린내 나는 글자는 깨끗이 씻기고, 내가 모르는 어떤 의미들을 해독하고, 조련하고, 길들이고 싶었다. 길들여진 것만이 세상에 나올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사람들이 길들이지 않은 것을 꼭꼭 감추고 살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처럼 그 글자들을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는 말, 질서 안에 들어가지 않는 말, 더 넓고, 크고, 위험한 세상을 향해 튀어 나갈 듯이 웅크리고 있는 말. 나는 때때로 그 야생의 글자들을 비린내와 싸구려 볼펜 잉크 냄새를 벗겨 ‘진실’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해 나의 문장으로 만들곤 했다. 나는 자주 엄마의 단어를, 문장을 훔쳐 썼다.
‘여성의 텍스트란 무엇일까요?’
어느 서가 앞에서 질문을 받았고 나는 진실이라 믿는 것들을 말했다. 여성이 받아온 사회적 제약과 제한, 모성, 쓰고자 하는 욕망. 결국 쓸 수밖에 없는 운명 등등.
“빠진 게 있어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질문자가 말했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야성이요. 여성이 가진 야성이요.”
그 말 한마디가 우리 사이의 침묵을, 내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때렸다. 내게도 야성이라 부를 수 있는 게 있을까. 한 번도 표출해 본 적 없는, 그러나 전화번호부, 전단지, 속 야생의 단어들을 보며 막연히 짐작해 본 ‘야성’. 그날 이후 그 말이 나를 사로잡았다. 내게 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 단어가 이토록 나를 사로잡은 것은 어떤 진실을 고쳐 쓰기 위함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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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 멘디에타, ‘모래여자’ 시리즈, 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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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치속젓, 생활비, 글 쓰는 여자, 삶, 잘못된 건 아닐까.
나는 이 글자들을 해부하기 위해 하얀 화면 위에 올려놓는다. 칼을 대기도 전에 시뻘건 심장처럼 박동하는 것들이 있다. 살아가려는 각오와 살아남으려는 의지 같은 것. 가벼우면서도 진한 그 글자들은 중심부와 주변부를 나눌 수 없고, 흩어진 채로 한 여성의 세계를 구성할 뿐이다.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 탄생한, 청중도 독자도 없는 말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여성의 텍스트들이 감춰져 있을까. 나는 그 말들의 조련사가 아니라 조력자가 되어야 했다. 네모 칸 안의 네모 칸, 그 속에 들어가 볼펜으로 그은 빗금을 거둬내고 그 말들을 해방해야 했다. 나는 말들의 목격자가 되어야 했다. 그것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한 여성의 삶을, 그 삶의 의미를 묻고 따지고 외치는지 증언해야 했다. 나는 그 말들을 절실하게 쫓되 개입하지 않는, 겸손한 추적자가 돼야 했다. 나는 한 여성의 야성을 길들이려는 힘에 저항하고, 그 야성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일에 동참해야 했다. 수십 년 전에 양파껍질과 코를 푼 화장지, 어린이용 스케치북, 플라스틱 봉지, 생선 내장들과 함께 버려진 그 글자들의 주인에게 말해야 했다.
흩어진 말을 모아봐, 문법 같은 것은 신경 쓰지 마, 문학적 표현도 필요 없어. 비린내 나는 말도, 푼돈 냄새 나는 말도 아름다워. 틀린 것을 드러내봐. 틀린 것으로 하나뿐인 정답을 만들어봐, 엄마만의 글을 써줘. 내가 독자가 될게.
어쩌면 엄마는 내가 쓸 수 없는 글을 쓰지 않았을까. 종이 위에 얌전히 누운 글자가 아닌, 야생마처럼 거침없이 달리는 글, 야성이 깨어 있는 여성의 글.
그러나 쓰레기통으로 사라진 그 말들은 이제 이곳에 없다. 나는 더 이상 조력자나 목격자나 추적자가 될 수 없다. 이제 내게 남은 기회는 딱 하나다. 복원사가 되는 것.
내가 이곳에 옮겨 적은 ‘갈치속젓, 생활비, 글 쓰는 여자, 삶, 잘못된 건 아닐까’라는 말은 오래전 엄마가 전화번호부나 전단지에 썼던 말들과 결코 같을 수 없다. 수많은 말들 중에 내가 선택한 단어들만 나열된다는 것만으로도 내 시선의 개입을 의미하니까. 그때 엄마의 말이 품은 순수한 야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 복원에는 두 번째 시간을 산다는 의미가 있다. 엄마가 쓴 글을 내가 두 번째로 살아볼 기회 말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두 번째 시간을 살기 위해서다. 부주의와 무관심으로 놓쳤던 타인의 말을 다시 살아보기 위한 것이다. 그 말의 의미를 분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정신분석학자가 아니니까. 나는 그저 말을 담는 사람, 담은 말에 음표와 쉼표를 그리는 사람, 그렇게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고, 그것은 내가 놓친 것들을 복원하는 방식이다.
오늘 내가 연필로 쓴 진실은 한 여성의 야성이다. 물론 이 진실은 굶주린 늑대와 함께 사막을 장악하길 바라지 않는다. 다만 사막의 모래가 되길 원할 뿐. 고치고 지우고, 깎고 닳아져 사막에 펼쳐진 모래 한 알이 되기를 바란다. 최소 단위의 사막, 그러나 사막의 본질일 수밖에 없는 모래알을 꿈꾼다. 나의 그 사막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소바주가 아닐까? 어떤 향이 날까? 유리병이 아닌 종잇장에 담긴 나의 진실, 이 소바주의 향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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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책장 앞을 서성이고, 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우고 이야기를 꿈꿨다. 산문집 <창문 너머 어렴풋이>, <몽카페>, <열다섯 번의 낮>과 <열다섯 번의 밤>을 썼고, 아니 에르노의 <세월>, <진정한 장소>를 비롯한 여러 책을 옮겼다.@malletshin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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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매일을 쌓는 마음] 출간기념 이모저모_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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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혜은 작가 북토크 ‘되고 싶은 내가 되기 위한 내 삶의 지망생들을 위해’ 혜은 작가님이 <매일을 쌓는 마음>의 문장들을 차곡차곡 쌓은 공간 ‘작업책방 씀’에서 여러분과 마주하는 자리 마련했습니다. 내 삶의 지망생으로서 매일의 문장들에 마침표를 찍어나간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매일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사람’ 미화리 작가님이 사회를 맡아 더욱 뜻깊은 시간 될 거예요. • 3월 30일(토) 낮 2시, 작업책방 씀 • 신청은 작업책방 씀 인스타그램 DM으로 받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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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업책방 씀 ‘작가의 책상전’ ~3월 31일(일) ‘작업책방 씀’의 2호 작업자이자 참된 일기인간 윤혜은 작가의 책상전이 열립니다. <매일을 쌓는 마음> 안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문장이 물성으로 가득 펼쳐져 있어요. 오늘이라는 마침표를 찍으며 되고 싶은 내일의 나로 나아가는 그 기특하고 뭉클한 조각들을 책 안팎으로 촘촘히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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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은 작가님과 미화리 작가님이 운영하는 유튜브 ‘책방로그’에서 혜은 작가님이 직접 소개하는 책 이야기, 그리고 책에 추천의 마음을 가득 담아주신 미화리 작가님의 추천사 낭독까지 알차게 만나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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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루X박세미 북토크 ‘나라는 방을 구축하는 것들에 관하여’ 오후의 소묘의 애틋한 공간 리브레리아Q에서 열리는 <자기만의 방으로> 세 번째 북토크 소식입니다. 고양이 탄이와 단둘이 살고, 일주일에 두 번 작업실로 출근해 그림책과 문장을 어른들과 함께 읽는 무루 작가님, 문학과 건축, 두 축에 속해 있으며 설화 씨와 산책하고 시를 쓰고 건축 이야기를 하는 박세미 시인님, 이 두 분이 나라는 방을 구축하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 나눕니다. 그림책과 시, 거울과 유리, 고양이와 개, 산과 건축, 서로를 이루는 단어들을 유영하며 나에게서 우리에게로 이르는 시간- 함께해요. • 3월 28일(목) 저녁 7시 30분, 리브레리아Q • 신청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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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오후의 소묘 스튜디오(서울 은평구 응암동) • 시간: 화-토 15:00~18:00 | 3시간 15,000원(다과 포함) • 링크 : 네이버 예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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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의 마지막 문단에서 한참을 멈췄습니다. 저 역시 쓰는 몸을 만들고 싶은 막연한 마음을 늘 안고 살기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요즘은 공허함을 많이 느끼는데요, 도대체 그 마음이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무언가 던지지 못하고 있는 질문이 있는 건 아닌지.. 이런 고민들이 하루의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어요. 레터를 읽고 나니 이런 복잡하고 알 수 없는 마음들이 나선을 이룰 때 재미삼아 별자리 운세를 읽으며 메세지에 얽매이지 않는 즐거움을 찾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적 신문의 귀퉁이에 있던 띠별 운세를 읽으며 소망하던 것을 끼워맞추던(?) 기억도 떠오르네요 ^^ 오늘의 나를 말하는 메시지야 어떻든 별자리 운세를 읽는 순수한 즐거움을 누리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 _inyoung0408
혜은 작가님의 문장들을 징검다리 삼아 벌써 인영 님만의 질문과 대답을 내놓으신 것 같아요. 복잡하고 알 수 없는 마음들 사이로 즐거움이 별자리처럼 콕콕 이어지는 봄날 되시기를 바라요. 늘 고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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