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화리의 영화처방 편지 세 번째 봉투를 건넵니다. 미화리의 영화처방 편지 세 번째 봉투를 건넵니다. 우리 모두가 비슷하고도 또 다른, 크고 작은 고민들을 안고서 저마다의 영화를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바라는 엔딩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며 하루하루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번 책을 작업하며 애틋하게 느끼고 있어요. 지난 편지가 우리에게 “눈에 띄지 않아서 나조차도 있는 줄 몰랐던 능력이 뭐가 있을까” 떠올려보는 시간 주었기를 바라며, 오늘은 미화리의 특별한 PS. 속 <힐빌리의 노래>의 할머니 대사 “우리의 시작이 우릴 정의하더라도 매일의 선택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을 건네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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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화
‘살면서 한 번은 가족을 떠나야 한다’는 문장은 3년의 베를린 생활 끝에 내가 얻은 결론입니다. 만일 그때 베를린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잠시 궁금해 하다가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에 재빨리 현실과 눈을 맞춥니다.
집을 떠나 베를린으로 향한 건 스물아홉 봄이었습니다. ‘(그런 가정환경에서) 참 잘 컸다’는 이웃들의 안도를 훈장처럼 달고 다니던 때에, 이대로 직장을 다니면 승진도 하고 결혼도 했을 나이에 돌연 독일로 떠나버렸지요. ‘일단 오기만 하면 그 이후 생활은 어떻게든 된다’는 친구의 말에, 이 지긋지긋한 가족에게서 멀어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럴 기회가 평생에 단 한 번 주어진다면 그게 지금이라는 확신이 들었거든요. 8000킬로미터나 떨어진 저쪽의 삶이 어떨지는 예상할 수 없었지만 떠나지 않을 경우 이쪽에서 벌어질 일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지금처럼 사는 것. 어떤 하루를 보냈든, 어떤 상상으로 내일을 계획하든 무효화 시켜버리는 집에서 태어난 벌을 받으며 사는 것. 내 인생을 펼치지도 못하고 집 크기만큼 쪼그라든 채 사는 것. 딱 그 크기만큼의 세상만 사는 것. 당시의 나는 누군가 나를 이 집에서 해방해 주길 바라고 있었는데요. 베를린이라는 선택지 앞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 집에서 나를 해방해 줄 누군가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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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일에 진학했고 가족 중 누구보다도 더 나은 삶에 가까워졌다. 바로 내 앞에 펼쳐져 있지만 가는 길이 쉽지 않으리란 건 이미 짐작했다. 정면승부만이 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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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 법대를 다니고 있는 JD는 로펌의 인턴 시험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번 학기의 장학금이 절반으로 줄어든 JD에겐 고액의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인턴 기회가 누구보다 간절합니다. 최종 면접을 앞둔 만찬 자리, 휴대전화에 뜬 누나 린지의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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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오면 안 돼?” “안 돼. 면접 주간이라 여기 없으면….” “그냥 좀 와주면 안 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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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적중했습니다. 엄마가 다시 마약에 손을 대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최종 면접은 이틀 뒤 오전 열 시. 이번 인턴 자리를 놓치면 대학을 제때 졸업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JD는 고민에 빠집니다. 엄마가 입원해 있는 오하이오는 면접장과 차로 열 시간이 떨어진 거리였거든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JD의 머릿속에 엄마가 손을 내밀던 어린 시절이 자꾸 아른거립니다.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좋은 어른은 아니었지만 나를 사랑하는 건 분명했던 엄마의 모습이요.
JD는 오하이오로 향하기로 합니다. 면접까지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엄마를 모른 척할 수 없었거든요. 병원에 가보니 엄마의 상태는 예상보다 훨씬 좋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예약한 요양원에도 들어가지 않겠다며 악을 써대는 엄마를 보니 JD는 마음이 약해집니다. 내일 면접에 제때 도착하려면 한 시간 반 안에는 떠나야 하는데 이렇게 엄마를 혼자 내버려두고 가도 되는 걸까, 면접에서 합격하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그러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또 마약을 하려는 엄마를 발견하고 나니 누군가의 얼굴이 강렬하게 떠오릅니다. 예정되어 있던 딱 이 모양대로의 미래에서 나를 꺼내준 사람. 할머니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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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 론 하워드 감독, 2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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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가 예일대에 진학할 수 있었던 건 전부 할머니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고함이 오가는 식탁 위에서도 수학 문제를 풀던 JD가 점점 학교와 멀어지는 걸 지켜보던 할머니는 JD를 집에서 데리고 나옵니다. 가로막는 엄마를 뿌리치며 할머니를 따라 나서던 어린 JD도 실은 알고 있었던 거겠죠. 이대로 살다간 엄마에게서, 이런 환경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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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는 주사기를 빼앗기고 침대에 누워 울부짖는 엄마의 손을 놓기로 결심합니다. 엄마의 손은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JD를 자꾸 그 시절로 데려다 놓거든요. 엄마의 손을 놓지 않는 한 JD는 과거에서, 이전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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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엄마. 빨리 나았으면 좋겠어. 행복했으면 좋겠고. 내가 도와줄게. 최선을 다할 거야. 근데 여기 있진 못해. 여기 있어서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돼. 나는 가야 해. 포기하지 마, 엄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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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머물던 3년간, 독일과 한국의 물리적 거리감은 나의 숨통을 트여주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가족은 아무래도 여전할 것이었고 비슷한 사건들이 반복되었겠지만 나는 모를 수 있었거든요. 분명히 일어난 일도 내가 모르고 지낼 수 있다면, 내 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다는 게 무책임하게 좋았습니다. 그렇게 점점 가족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문자) 통보에 가족의 비난을 견뎌야 했지만 이전처럼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여기는 독일이니까. 가족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으니까. 아마 가족에게도 큰 충격이었을 겁니다. 내가 영영 가족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요.
한국으로 돌아온 후 가족과의 관계는 크게 변했고 또 변하지 않았습니다. 내 기분을 단번에 밑바닥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사람들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지만, 가족과 분리된 나의 고유한 삶이 존재한다는 걸 서로가 알게 되었다는 게 큰 변화입니다. 그러니 가라앉은 기분 또한 얼마든지 스스로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요. 더 이상 가족에게 사로잡혀 내게 주어진 기회와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놓치진 않을 겁니다.
이 ‘베를린 사건’은 가족은 나의 전부가 아닌 일부이며, 내 삶을 망치는 것도 구원하는 것도 오로지 나여야 한다는 걸 알게 해준 경험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부모를 실망시켜야 했지만, 필요하다면 저는 또 그들을 실망시킬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게 나를, 내 삶을 살리는 일이라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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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은 가정폭력이라기엔 애매한 학대를 하는 집이었습니다. 사회에 나와 보니 온전한 대인관계를 이루기 어려웠습니다. 제대로 된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니깐요. 흔히 말하는 은둔형 청년이 되었고 일은 하지만 대인관계 없이 지낸 지 7년이 넘어갑니다.
과거에는 가능성도 기회도 많았습니다. 원하던 대학도 합격했고 대기업도 여러 번 최종합격하고 공모전에도 붙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번번이 가족은 제 발목을 잡았습니다. 덕분에 모든 기회는 날리고 무기력에 빠졌습니다.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집안일은 저의 몫이었고 다른 친구들은 놀러갈 때 저는 빨래를 하고 반찬 고민을 해야 했어요. 20대가 되면 독립해서 진정한 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버티고 또 버텼습니다. 그런데 저의 20대는 흔한 사진 한 장 없이 집에서만 보내게 되었네요.
요즘 드는 생각은 돈도 명예도 직업도 아닙니다. 과연 나는 뭘까, 왜 살아야 할까같이 부질없는 고민이에요. 30대에는 삶이 바뀔 수 있을 거란 생각도 이제는 모르겠습니다.
-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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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의 할머니는 JD에게 이런 가르침을 주었다고 해요. ‘우리의 시작이 우릴 정의하더라도 매일의 선택으로 달라질 수 있다.’ Y 님의 시작은 이미 정의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앞으로의 삶은 Y님의 선택으로 달라질 거예요. Y 님을 망하게 하는 것도 Y 님을 구원하는 것도 오로지 Y 님 자신이어야 합니다. 가족에게 그 권리를 넘겨주지 마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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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공인 영화처방사. 영화를 곁에 두고 글을 쓴다. 여전히 이야기의 힘을 믿고 있다. ‘영화책방 35mm’를 운영했고, 지금은 망원동에서 ‘작업책방 씀’을 동료와 함께 운영한다. 《Moved by Movie》(2024), 《영화관에 가지 않는 날에도》(2022), 《수어》(2021),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2020)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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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나도 영화처방사!] 이벤트는 연재 기간 계속 열려 있으니 많은 참여 바라요 :)_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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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영화처방사!] 세 번째 고민 사연에 처방할 나만의 영화가 있다면 꼭 추천해 주세요.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 출간 후 저자 사인본을 보내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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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오후의 소묘 스튜디오(서울 은평구 응암동)
• 시간: 화-토 15:00~18:00 | 3시간 15,000원(다과 포함) • 신청하기: 네이버 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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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까지 천천히] 출간 전 연재,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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