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야가 되었건 무엇을 많이 좋아하다 보면 언젠가는 국가의 테두리가 좁다고 느껴지는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덕후의 존재란 그런 것입니다. 덕질이란 필연적으로 세계화, 그러니까 여러 나라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아름다운 길이지요. 책을 예로 들면, 어떤 주제 혹은 장르를 꾸준히 읽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다른 언어로 쓰인 책까지 관심을 확장하게 됩니다.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 책이 이미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하지만 모든 책이 번역 출판될 수는 없는 터라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외국어라는 벽 앞에서 좌절하게 됩니다. 세계화 시대에 책을 구하는 거야 일도 아닌데 펼쳐봤자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라면…. 그래서 관심 가는 외서를 만났을 때 보통의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번역본은 언제 나올라나?’ 또는 ‘이거 번역되면 좋을 텐데…’
여기서 출판인들은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좋은 외서를 찾아다니는 게 업무다 보니까요.
‘판권이 아직 살아 있으려나? 선인세는 얼마쯤일까?’
그 책을 자신이 출판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그렇습니다. 책을 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지레 포기하게 되거나, 책을 내기 위한 구체적 절차를 준비하곤 합니다. 이때 어떤 선택을 할지는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비슷한 상황이라도 개인의 모험 성향에 따라 차이가 생기곤 하죠.(하루키의 소설 신작이 일본에서 출간되었는데 선인세가 얼마쯤일지 고민하며 판권을 문의하는 1인 출판사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만, 루피가 해적왕이 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위대한 항로에 몸을 던지듯 모험심 강한 1인 출판사가 또 아예 없지는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자신이 출판할 수 없는 경우라면(대개는 주제나 장르의 제약 때문에) 이때는 대부분의 출판인들이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아, ㅇㅇ출판사에서 내줬으면 좋겠다.’
저 역시 얼마 전에 그런 책이 있습니다. <Marx for Cats : A Radical Bestiary> 고양이를 위한 마르크스라니, 제목을 보는 순간 눈이 뿅-하고 튀어 나올 뻔했습니다. 듀크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왔으니 아마 학술서 같은데… 홈페이지에 있는 책 소개글을 번역기로 돌렸더니 궁금증은 더 커져갔습니다.
“『고양이를 위한 마르크스』의 서두에서 Leigh Claire La Berge는 “모든 역사는 고양이 투쟁의 역사”라고 선언합니다. 마르크스주의 비평에 맞게 중세 설화 형식을 수정한 La Berge는 서양 경제사를 통해 고양이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에 있는 동물성을 드러냅니다. 그녀는 자본주의의 봉건적 선사시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시대, 자본주의를 지지했던 부르주아 혁명과 이에 반대했던 공산주의 혁명을 아우르는 1,200년의 역사를 통해 고양이가 오랫동안 경제 비판과 해방 가능성의 동물로 이해되어 온 과정을 설명합니다. 사자, 호랑이, 살쾡이, ‘사보태비’의 반복적인 기록적 등장에 주목함으로써 La Berge는 고양이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경제를 상상하는 방식에 중심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생태 위기의 순간에 인간과 동물이 서로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질문함으로써 생태사회주의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한 현재의 논쟁에 동참합니다.”
모든 역사는 고양이 투쟁의 역사,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에 있는 동물성, 고양이가 오랫동안 경제 비판과 해방 가능성의 동물로 이해되어 온 과정, ‘사보태비sabo-tabbies’의 반복적인 기록적 등장, 생태 위기의 순간에 인간과 동물이 서로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질문함으로써… 정말 멋진 말들의 향연입니다. 그런데 이 책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오후의 소묘에서 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듀오링고 연속학습기록 504일 차에 접어드는 실력으로 과연 이 책을 영어로 읽을 수 있을까 0.5초 정도 고민도 해봤지만 역시 논리적인 결론은 단 하나, 전진입니다,가 아니라,(이미화 작가님의 신간 <엔딩까지 천천히>를 보셔야 이게 개그가 되는데…)
“ㅇㅇ출판사에서 내줬으면 좋겠다.”
대체 무슨 얘길 하려고 이러는 건가 갸웃하실 수도 있는데요. 오늘은 <소소한 리-뷰> 코너지만 고양이 얘기를 하는 날입니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절대’라거나 ‘무조건’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건 다수의 이해가 충돌하고 여러 입장이 얽혀 있는 건 물론이고 좋음과 나쁨의 경계마저 뿌옇게 흐려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대 그렇다/그렇지 않다, 무조건 맞다/아니다, 라는 말이 누군가에게 잠깐의 쾌감을 선사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웬만하면 몇 배의 곤란함을 동반하게 됩니다. 종교나 왕권이 모든 가치 판단을 독점한 상황이 아니라면, 인간 사회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 그런 건 없습니다. 절대 없는데, 무조건 없는 게 맞는데 말입니다. 어떨 땐 또 있기도 하더라고요. 저 같은 경우엔 무언가 고양이가 엮이면 그렇습니다. 고양이이라면 무조건 인정이지, 가 되어버리는 상황인 거죠. 평소라면 영어로 408쪽이나 되는 사회 경제학 책을 보고 무턱대고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Marx for Cats>에 관심이 갔던 이유는 오직 고양이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고양이라면 절대적으로 궁금할 수밖에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그렇게 절대적으로 옳으며 무조건 가봐야 할 전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요물, 우리를 홀린 고양이> 여기도 제목부터 예술입니다. 홈페이지에 소개된 전시 개요를 한번 보실까요?
“고양이는 일찍이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큰 눈, 조그만 코, 통통한 볼과 3.6kg의 평균 체중을 가진 고양이는 사람 아기와 비슷한 외형과 체구로 우리의 보호본능을 일으키며 야생에서 도도하게 살다가도 필요할 때는 인간을 찾아와 애교를 부리며 노련하게 인간을 조종해 왔습니다. 이 뻔뻔하고 귀여운 생명체에게 옛사람들은 자신의 고기반찬을 내어주었고 요즘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을 ‘집사’로 칭하며 지갑을 엽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고양이에게 홀려 온 우리 인간들을 깨우치기 위해 이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고양이들의 무시무시한 세계 정복의 비밀을 파헤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