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 하늘은 무슨 색인가요? 당신은 무슨 색을 ‘하고’ 있나요? 손에는 무엇을 쥐고 있나요? 오늘은 아쉬운 소식을 전해드려요. 지난해 5월에 <가정식 책방>을, 6월에 <엄마의 책장으로>를 시작해,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밀도 높은 글로 만나온 두 작가님의 연재를 이달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완전한 결말’은 아니지요! 더 풍성한 이야기들을 모으고 엮어 하반기에 새로운 모습으로 또다시 찾아올 거예요. 정한샘, 신유진 작가님에게 보내주신 답장들, 응원 모두 감사합니다. 레터 연재로서는 마지막 글이 될 오늘의 편지, 애틋하게 읽어주세요. 그곳 하늘은 무슨 색인가요? 당신은 무슨 색을 ‘하고’ 있나요? 손에는 무엇을 쥐고 있나요? 잃어버린 것과 박힌 것을 헤아리며 우리 손에 같은 책을 들고, 통통통, 같은 방향으로 걸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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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틴 소설을 사랑한 여자아이가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린, 잃어버린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글: 신유진
여름 저녁에는 엄마랑 자두 한 알을 손에 쥐고 서점까지 걸었다. 동네서점은 사계절 내내 자주 다니던 곳이었는데, 그 길을 생각하면 유독 여름 풍경이 떠오른다. 일몰 때문이었을까.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면 온통 오렌지빛이었다. 그걸 보면 엄마는 마음이 이상하다고 했다. 마음이 이상한 것은 기쁘다는 뜻일까, 슬프다는 뜻일까. 좋다는 걸까, 싫다는 걸까. 나는 엄마가 자주 쓰던 그 말을 완벽하게 해독하기 위해 애썼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언어를 공부할수록 내가 모든 언어를 근사치로 이해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라, 지역, 사람, 동물, 모든 장소와 생물마다 저마다의 언어가 있고, 우리는 자신의 경험과 자기만의 언어를 토대로 짐작하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게 전부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보면 모두가 서로의 이방인일 테고.
나의 첫 번째 이방인, 엄마. 나는 늘 엄마의 말과 속이 궁금했다. 나를 사랑한다는데 불행한 것 같았고, 사랑과 불행이 어떻게 함께 있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번역자가 되고 싶었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내 것으로 옮겨보고 싶었고, 잦은 실패에 절망했지만, 나와 그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난 후에는 관계 속에서 내가 느꼈던 실망이나 절망이 더는 불행이 되지 않았다. 그게 엄마와 나의 다른 점이지 않았을까. 엄마는 모두 같은 언어를 쓴다고 믿었고,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되지 않음을 힘들어했다. 무엇보다 이해받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잘 보이는 곳에 펼쳐져 있던 일기장도, 서점에 갈 때마다 엄마가 들려줬던 책 이야기도 모두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엄마가 들려줬던 책 이야기 중에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이었다. 두 작가가 자매라는 사실도 신기했고, 특히 《폭풍의 언덕》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심장이 쿵쾅거렸다. 요크셔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풍경이 눈앞에 그려졌고, 황량한 들판에 바람 부는 언덕에서 말하는 ‘사랑’이 내가 아는 사랑과 너무도 달라서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사납지만 순수한 맹수 같다고 해야 할까. 나는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내 안에 언덕을 그리고 그곳에 올랐다. 거기서는 이야기가 폭풍처럼 달려왔고 그러면 엄마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래서 서점에 가는 길이 좋았을까. 읽어본 적 없는 책 이야기를 들으면 내 앞에 엄청난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아서. 하지만 제일 좋았던 건 역시 엄마 손을 잡고 걷는 일이었다. 그 손을 잡으면 어떤 언덕을 올라도 안전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안전하다는 감각이 좋았고, 오랫동안 그 느낌을 찾아 헤맸다. 누군가의 손을 잡았고, 놓았고, 몇 번의 실패를 겪고 나니 그 감각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지금 내게는 하나씩 쌓아 올리는 행복에 가까운 감정이 있다. 말하자면 반려견의 목줄을 잡고 있을 때, 나는 그 목줄이 언젠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그 줄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행복하다. 불안할수록 내 악력이 강해지는 것도 좋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엄마 역시 불행했던 게 아니라 불안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추측일 뿐이고, 진실은 그 시절의 엄마만이 알고 있겠지만. 엄마의 과거, 지나간 물음을 붙잡고 있는 것은 내 방식의 돌봄이다. 나는 과거의 엄마에게 잘해주고 싶다. 그건 나의 근원지를 돌보는 일이니까. 과거의 엄마에게 대답해 주고 싶다. 그건 지금 내게 필요한 질문을 찾는 일이니까.
“나는 뭘까?”
어느 날 서점에서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물었다.
“엄마는 엄마, 우리 엄마.”
나는 대답했다.
엄마는 내 대답에 웃었던 것 같다.
언젠가 내가 물은 적도 있었다.
“엄마, 나는 뭘까?”
“그 답을 찾아가는 게 인생이지. 살다 보면 알지 않겠니?”
엄마가 말했다.
그때도 엄마는 엄마가 무엇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엄마가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 있으리라 믿었던 것 같다. 아니면 그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지도. 그런 건 없다고 말한다면 실망할까. 그래도 내가 찾은 답을 말해주고 싶다. 20년 전 여자아이의 손을 꼭 쥐고 서점을 향해 걷던 여자에게, 자기 안에 중요한 무언가를 잊은 것 같다고, 잃어버린 것 같다고 일기장에 썼던 엄마에게 말이다.
이야기는 우리가 자주 갔던 그 서점에서 산 하이틴 로맨스 소설로 시작된다. 물론 내가 한때 하이틴 소설 마니아였다는 사실도 고백도 해야겠지. 제목을 ‘하이틴 소설을 사랑한 여자아이’라고 붙인다면 누군가는 진부하다고 생각할까? 그렇다면 되묻고 싶다. 무엇이 진부한가? 하이틴 소설, 여자아이, 사랑. 이 세 단어에서 진부한 것을 발견하는 사람은 아직 하이틴 소설을, 여자아이를,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아니, 잊은 것이다. 잃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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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이틴 소설을 사랑한 여자아이가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린, 잃어버린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좋아했던 소설의 몇몇 장면들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줄거리는 잊었어도 어떤 장면들의 디테일한 묘사는 기억하고 있어요. 사실 내가 좋아했던 것은 줄거리가 아니라 디테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연애 이야기에도 디테일이 더해지면 모든 게 달라지거든요. 비버리 클리어리의 《오렌지향은 바람을 타고》가 그래요. 정말이지 그 책은 디테일이 전부였습니다. 일 년 내내 비가 오는 오리건주에 살던 10대 여자아이, 셸리가 일 년 동안 캘리포니아의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일어난 일을 다룬 그 하이틴 로맨스 소설은 자칫 진부할 수 있는 로맨스를 어디선가 오렌지 향기가 날 것 같은 디테일한 표현들로 구원합니다. 나는 그 소설을 약 30년 전에 읽었고, 사실 주인공, 셸리가 어떻게 사랑을 만나고 헤어졌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내 사랑은 오렌지와 캘리포니아와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 셸리의 첫사랑, 필립의 코입니다. 정확히는 그 문장을 기억하는 것이지요. 캘리포니아 태양에 그을린 필립의 코와 처음으로 필립의 코를 가까이 바라보게 된 셸리와 오렌지 향기로 뒤덮인 밤공기를요. 소설의 그 사소한 장면이 내 삶과 가치관에 어떤 도움을 줬는지 묻는다면, 딱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물론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났을 때, 코를 유심히 살펴본 적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 하나는 얻었지요. 소중한 순간을 무심히 흘려보내지 않고 붙드는 방법이요. 하이틴 로맨스 소설은 다시 오지 않는 삶의 마법 같은 순간을 내 안의 보물 상자에 담아 간직하는 법을 알려줬습니다. 그 상자를 열면 필립의 코와 오렌지 향기가 나는 밤거리를 상상하던 내가 있습니다. 내가 아는 필립은 필립모리스 담배가 전부이고, 캘리포니아에는 가본 적도 없지만, 어떤 코와 나만의 장소를 그리워합니다. 그걸 온몸으로 감각하던 내가 제일 그립고요. 아마 40년 후에도 그 상자를 열면 뜨거운 태양과 오렌지 향기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건 분명 후회의 반대말이겠지요.
지금부터 40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아니, 상상할 것도 없습니다. 나는 이미 잘 알고 있거든요. 너무 선명해서 그릴 수도 있습니다. 어느 여름일 거예요. 나는 얼굴이 칙칙해 보이는 게 싫어서 색이 환한 옷을 입고 있을 겁니다. 당신이 말했잖아요. 내가 환한 색이 잘 어울린다고. 나는 80세가 되어서도 당신의 말을 떠올리며 환한 옷을 고를 겁니다. 환한 옷. 그건 내 곁에 없을 당신을 향한 환한 그리움이겠지요. 그런 그리움이 찾아오면 뭘 할 수 있겠어요? 샴페인을 마셔야죠. 나는 샴페인을 좋아하고, 80세쯤 되면 꼭 생일이 아니어도 그런 비싼 술을 마셔도 되지 않을까요? 꼭 샴페인이면 좋겠습니다. 혼자 건배해도 즐거울 수 있는 술이니까. 네, 나는 자주 혼자일 거예요. 노년이란 그런 것이잖아요. 그렇지만 나는 그을린 코와 오렌지 향기, 이제 내 곁을 떠난 사랑하는 이들, 그들과 함께 살아온 인생을 위해서 건배할 겁니다. 물론 샴페인은 플뤼트 글라스에 따라 마실 거예요. 내가 말했잖아요, 디테일은 전부라고. 그럼, 이제 건배. 살아온 인생을 위해 건배. 그런데 인생이란 뭘까요? 낮잠 한숨 자다가 일어났는데, 어느새 많은 것들이 떠나고 덩그러니 나만 남겨지는 그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맞아요. 당신이 그랬듯이 내게도 그런 질문들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답을 이미 알고 있어요. 인생이 뭐냐고요? 그건 여름 저녁의 일몰입니다. 당신이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동안 당신의 머리 위에 있던 그 오렌지빛 하늘이요. 당신이 신었던 슬리퍼, 뒤로 묶은 머리카락, 헐렁한 치마, 걸음걸이, 우리 앞에 자동차가 지나갈 때 내 손이 아플 정도로 힘을 줬던 당신의 손, 잘 깨지고 부서지던 당신의 손톱, 나와 똑같은 그 손톱. 나는 그런 게 인생이라고 말할 겁니다. 매일 반복했던 것, 자주 함께했던 것, 손에 쥐었던 것, 걸었던 곳, 나눴던 말, 그런 것이요. 어때요? 당신이 지금 품고 있는 질문에 작은 힌트가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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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뷔야르, <해 질 녘 바다, 해안의 여자들>, 1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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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뭐냐고요?
나도 가끔 같은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뭘까요?
언젠가 당신은 내게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선물했어요. 아마도 우리 안에 있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찾고 싶었던 거겠죠. 당신은 하나의 존재 안에 대립이자 보완되는 두 존재가 있고, 둘 중 누구를 깨워 사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당신이 내게 이렇게 물었거든요.
“너는 누구야? 너는 누가 되고 싶어? 나르치스야? 골드문트야?”
그때 나는 골드문트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유로워 보였거든요. 자유가 뭔지 모르면서. 지금 누군가 내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내 대답은 조금 다를 겁니다.
내가 누구냐고요? 나는 서점에 가는 길에 《폭풍의 언덕》과 《제인 에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이야기하며 노을을 보고 자두를 먹었던 사람입니다. 한때 당신의 손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 그게 나예요. 여름 저녁, 노을, 자두, 서점. 당신의 손, 당신과 내가 나눴던 모든 것이요.
내가 인생의 마지막 건배를 한다면, 그때 내게 남은 건 브론테 자매나 헤세의 문장이 아닌 당신의 말일 겁니다. ‘엄마가’로 시작하는 말, 그 모든 말이요.
당신, 지금 집으로 돌아가고 있나요?
손에는 어떤 책을 들고 있나요? 그 책을 읽고 여자아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건가요? 그런데 어쩌죠? 여자아이의 마음은 이미 오렌지 향기가 날리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모르는 당신은 방금 “하늘이 오렌지빛이다”라고 말했어요. 정말인가요? 지금 하늘이 오렌지빛인가요? 여자아이의 손은 얼마나 작나요? 그러고 보니 여자아이와 당신은 손톱이 똑같아요. 작은 것도 놓치지 말고 자세히 봐야 해요. 당신이 말했잖아요. 디테일은 모든 것이라고. 정말 그래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게 전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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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틴 로맨스를 사랑한 여자아이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물론 완전한 결말은 아니다. 질문은 또다시 찾아올 테니까. 어쩌면 나의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물음과 이야기들이 나를 좌절시킬지도 모르지만, 그런 날에는 서점에 들러볼 생각이다. 읽고 쓰는 것이 마냥 좋은 어떤 여자아이들이 또 거기서 어떤 놀라운 세계를 짓고 있지 않겠는가. 그 애들이 써줄 이야기를 기다린다. 그 애들은 내가 가닿지 못한 곳을 갈 수 있겠지. 내가 놓친 말들을 옮길 수 있겠지. 그건 아마도 새로운 여성 서사일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처음으로 느낀다. 그래, 좋은 것이구나. 이건 정말 샴페인을 터뜨릴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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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책장 앞을 서성이고, 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우고 이야기를 꿈꿨다. 산문집 <창문 너머 어렴풋이>, <몽카페>, <열다섯 번의 낮>과 <열다섯 번의 밤>을 썼고, 아니 에르노의 <세월>, <진정한 장소>를 비롯한 여러 책을 옮겼다.@malletshin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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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한샘
어렸을 때 압정을 밟은 적이 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압정이 어디에나 있었다. 당시 압정은 요즘 나오는 것처럼 다양한 모양이 아니고 납작한 모양 딱 하나여서, 바닥에 떨어지면 대부분의 경우 무섭고 뾰족한 바늘을 위로 하고 놓일 수밖에 없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압정을 밟지 않으려고 고개를 빼고 조심하며 걸었다. 압정을 밟는 것은, 그것이 발바닥에 박히는 것은 당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고 으으윽 하는 신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니까 나는 그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는 아이였다. 압정을 밟은 그날, 그것을 밟는 순간 내 몸의 가장 아래쪽에 있는 발바닥의 뒤꿈치 쪽이 뚫리는 선명한 느낌이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몸을 타고 올라올 때 나는 분명히 들었다. 봉제 인형에게 옷을 입혀준답시고 대충 천을 댄 채로 바늘을 이리저리 옮겨보다 솜이 빵빵한 배를 찔렀을 때 나던 ‘푹’ 소리와 매우 흡사한 그 소리를. 그리고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알았다. 내 손으로는 절대 이것을 빼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렇게 뾰족하고 날카로운 (게다가 생각보다 두꺼운) 것이 몸에 박혀 있다니. 그것을 밟지 않으려 얼마나 조심했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겨버린 것이다. 심장이 몸 밖에서 뛰는 것처럼 쿵쿵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대로 주저앉아 다리를 붙잡고 소리를 치며 우니 엄마가 뛰어왔다. 엄마가 내린 처방은 매우 공포스러운 것이었는데 망치로 뒤꿈치를 두드리는 것이었다. 망치로 압정이 박혀 있는 바로 그 옆을 통통통 두드리면 압정이 튀어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 흉측한 것이 몸에 박혀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공포가 극에 달했는데 망치로 옆을 친다니, 나는 그런 방법이 통할 리가 없다고 소리를 질렀다. 못을 박을 때나 쓰는 것으로 생각한 무시무시한 도구로 그 옆을 통통통 두드린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냥 빼달라고 하니 엄마는 확 빼면 피가 나고 오히려 안 좋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뭐가 안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엄마의 힘은 나보다 강했고, 버둥대던 나는 결국 무력하게 발을 내준 채로 마룻바닥에 붙어 절망적으로 소리치며 흑흑 울었다. 엄마는 망치로 정말 압정 옆을 통통통 두드리기 시작했고 망치로 두드린다고 압정이 나올 리 없다고 생각하며 울던 내게도 규칙적인 통통통 소리는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게다가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어리둥절한 마음에 울음소리가 억지가 되어갈 때쯤 엄마가 눈앞에 압정을 들이밀었다. 자 봐, 나왔잖아.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이 기억은 어린 시절의 제법 선명한 기억 중 하나로 남아있다. 문득 궁금해져서 ‘발바닥에 압정 박혔을 때’, ‘압정 빼는 법’ 등을 아무리 검색해도 박힌 압정 옆을 통통통 치라는 해결책은 나오지 않는다. 엄마에게 압정을 그렇게 빼준 적이 있었는지 물어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면서도 그게 무슨 민간요법이었을 텐데? 하신다. 그렇게 빼면 파상풍 위험이 있었을 텐데…라는 말도 함께. 엄마의 자신 없는 목소리에 한층 신뢰를 잃은 내 기억을 이번에는 언니에게 묻는다. 언니 역시 그랬던 것 같기는 한데 선명하게 생각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니만, 엄마는 여러 분야에서 종종 자기만의 방식을 썼었지. 라고 말한다. 그 말이 압정의 기억을 더욱 선명하게 소환한다. 아, 엄마는 엄마만의 방법이 있는 사람이었지. 엄마만의 압정을 빼는 방법, 엄마만의 옷을 만드는 방법, 엄마만의 비타민을 먹이는 방법.
엄마가 책을 좀 찾아달라고 한다. “파란 책인데… 지난달에 네 책상에 있어서 좀 읽어볼까 했거든? 그런데 몇 장 읽어보니 그땐 도저히 못 읽겠어서 덮었는데 어제가 딱 넉 달 되는 날이었잖아.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읽어볼까 해. 알아서 찾아 읽으려 했는데, 없더라.” 마주 앉아 밥을 먹다가, 그렇게 툭 건넨 말이었다. 바로 앞에 앉아 있지만 눈이라도 마주치면 큰일 날 것처럼 어깨 너머로 시선을 고정한 채. 엄마가 말한 책은 내가 아빠의 죽음 이후 비애의 공간으로 들어가 누워버렸던 바로 그 책, 조앤 디디온의 《상실》이었다. 내게 애도의 글을 찾아 읽고 싶다는 마음이 찾아오기까지 걸린 시간 4주. 엄마가 엄마에게는 낯설기만 한 이름의 작가가 쓴 남편의 죽음 이후의 글을 읽을 마음이 드는 데까지 걸린 시간 넉 달. 우리는 시간차를 두고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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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방향이어도 시간의 차이가 있으며 아빠를 잃은 나의 애도와 남편을 잃은 엄마의 애도는 그 모습도 나타나는 방식도 당연히 다르기에 엄마의 마음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아빠 없이 맞이한 첫 어버이날에 엄마에게 선물한 빨간 운동화는 결국 회색으로 바뀌어 신발장에 들어갔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 빨간색이었기에 좋아하기에 골랐던 신발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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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일 년은 빨간색을 안 하려고 해. 빨간색이 왜? 그냥… 빨간색은 좀 그렇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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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도 빨간색을 좋아하던 엄마에게 빨간색은 좀 그런 색이 되었구나. 엄마는 빨간색을 ‘하는’ 마음이 무엇이라 생각하는 걸까. 빨간색을 하면 애도의 마음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치 덜 슬픈 사람만이 빨간색을 하는 것처럼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엄마의 마음에 나는 알 수 없는 모양으로 어쩔 도리 없이 박혀 있는 그 압정을 빼주고 싶다. 내가 글과 책으로 도피해 나만의 애도의 벽을 쌓는 동안 엄마는 스스로 압정을 빼지 못해 빨간색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나. 한 번에 빼줄 수도, 빼는 방법도 모르니 그 옆을 통통통 두드리기라도 하고 싶다. 두드릴 때마다 피하고자 하는 것들에 문을 열어주기. 통. 떠난 남편을 애도하며 쓴 책을 읽어도 괜찮다고, 통. 빨간 운동화를 신어도 괜찮다고, 통. 재밌는 영화를 보고 웃어도 괜찮다고, 통, 친구들과 여행을 가도 진짜 괜찮다고.
엄마가 엄마만의 방법으로 내 뒤꿈치에 박힌 압정을 빼줬던 것처럼 나도 엄마의 마음에 박힌 압정을 빼주는 나만의 방법을 찾아내고 싶다. 그 방법을 찾으며 엄마의 마음을 돌보다 보면 내 마음에 박힌 압정도 통통통 빠져나갈 것이라 믿기에. 통. 엄마에게 책을 찾아주며, 통. 같은 책을 읽으며, 통. 서로가 친 밑줄을 살피며. 그렇게 통통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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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31일 가정식 책방 ‘리브레리아Q’를 열었다. 이탈리아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지금은 책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다. 딸과 나눈 책 편지 《세상의 질문 앞에 우리는 마주 앉아》를 썼고, 그림책 《구름의 나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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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서울국제도서전 [엔딩까지 천천히] [매일을 쌓는 마음] 행사 이벤트 🎉_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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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6일부터 30일까지 코엑스에서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립니다. <엔딩까지 천천히> <매일을 쌓는 마음> 두 작가님이 운영하는 ‘작업책방 씀’이 도서전에 참여하여 작은 행사와 굿즈를 준비했어요. I30 부스를 꼭 찾아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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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딩까지 천천히> 이미화 작가 사인회: 6월 28일 금요일 2시-4시 ☆ <매일을 쌓는 마음> 윤혜은 작가 사인회: 6월 30일 일요일 12시-2시 ☆ <엔딩까지 천천히>와 <매일을 쌓는 마음> 구매 시 특별 굿즈 ‘아크릴 코스터’를 증정합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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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엔딩까지 천천히] [매일을 쌓는 마음] 전자책 출간 🎉_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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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떠올려서 외워버린 말들이 있다.” _윤혜은, <매일을 쌓는 마음>
“내게는 사소한데 비범한 능력이 하나 있습니다.” _이미화, <엔딩까지 천천히>
두 책의 첫 문장을 소개해 봅니다. 마지막 문장까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전자책이 출간되었어요. 엔딩까지 천천히, 매일을 쌓는 마음으로 - 알라딘, 예스24, 교보문고, 리디북스에서 만나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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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오후의 소묘 스튜디오(서울 은평구 응암동)
• 시간: 화-토 15:00~18:00 | 3시간 15,000원(다과 포함) • 신청하기: 네이버 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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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집’이 된다는 이야기가 새로웠어요. _무명
새롭게 다가가는 이야기 전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감상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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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디아길레프> 보며 신유진 님이 쓰셨던 니진스키의 봄의 제전 글 떠올렸는데요. 오후의 소묘 레터까지 받아 벅차는 하루입니다. 신유진 님 글 읽으며 집과 여자의 삶, 집에 가고 싶다는 요양원에 계신 엄마와 집이 지긋지긋해 여행 떠날 곳을 찾는 나를 생각했어요. 삶은 혼돈과 막연의 연속입니다. 질문이 필요한 삶, 답보다 질문을 구하는 삶을 고민해보겠습니다. 다음 신유진 님 책은 꼭 오후의 소묘에서 펴내주시길요. _@siyoonmomanna
마지막 연재글에 꼭 맞는 마지막 문장! 감사합니다. 질문을 구하는 유진 작가님의 책으로, 너무 머지않게 만나뵐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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