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PS. 꽃밭을 만드는 마법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은 2024년 5월. 그러니까 왓챠를 통해 고민 사연을 받은 지 2년이 막 지난 시점입니다. 2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알고 싶어서 인스타그램에서 2년 동안의 게시글을 확인해 보았는데요. 왓챠 영화처방 이벤트를 알리는 게시글 이후로 저는 기혼자가 되었고, 어떤요일을 포함해 다섯 곳에서 연재를 마쳤으며, 다섯 번째 단행본과 한 권의 사진집을 출간했더라고요. 제자리걸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나선으로 걷고 있었다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대사가 생각나는 시간이었습니다.
2년간 한 달에 한 통씩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절반의 편지는 사연을 받은 2022년 상반기에, 나머지 절반은 최근에야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편지를 쓰면서 여러분의 2년은 어떠했을지, 2년이나 늦은 답장을 받아볼 여러분에게 제가 얼마나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걸지 걱정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러분이 완전히 다른 선택을 했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보기 좋게 저를 한 방 먹여주기를, 어떤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현실의 여러분을 대체할 이야기는 없다는 걸 제게 톡톡히 알려주기를.
편지를 쓰는 틈틈이 영화 보기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중에는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도 있습니다. 1000년을 사는 요정 프리렌이 먼저 세상을 떠난 인간 동료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혼이 잠들어 있다는 ‘오레올’로 향하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프리렌은 현재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엘프이면서 동시에 마왕을 쓰러트릴 만큼 무진장 강한 마법사인데요. 그런 프리렌이 가장 좋아하는 마법은 ‘꽃밭을 만드는 마법’입니다. 누군가는 그런 하찮은 마법을 좋아하는 프리렌을 비웃지만, 꽃밭을 만드는 마법은 길을 잃고 겁먹은 아 이를 안심시킬 수 있는 마법이거든요.
꼭 그런 마음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여러분에게 저의 마법과도 같은 영화를 소개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여러분의 영화처방사, 미화리
Cookie 내 모습을 인정하고 싶어요 | 백엔의 사랑 —H의 답장
안녕하세요. 제1막 마지막 고민의 사연자였던 H입니다.
영화를 감상하고 작가님의 글을 읽어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려 이제야 답장을 보내요. 사실 보고 읽기까지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절을 돌이켜보는 과정이다 보니 어떻게 후기를 남겨야 할지 많은 고민이 들었어요. 지난날의 고민이 지금까지도 온전히 풀리지는 않아서 조금은 씁쓸하기도 했답니다. 그럼에도 지금에서야 깨달은 한가지 사실은 ‘아, 나는 참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구나.’라는 점이에요. 저도 작가님처럼 영화를 좋아하는데, 성인이 되면 영화 속 세계만큼은 아니더라도 극적이고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펼쳐질 거라 기대했거든요. 하지만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제 일상을 못 견디고 도망치기 바빴던 것 같아요.
영화 속 ‘이치코’의 이야기 또한 누군가에게는 그저 하찮고 보잘것없는 인생처럼 보이겠죠? 이치코의 인생이 180도 달라질 일도 없을 거고요. 그렇지만 이치코는 앞으로 링 위에 올라갔던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시간이 흘러 ‘32살의 복싱 선수 도전기’를 남들 앞에 무용담 털어놓듯 웃으며 말할 수도 있을 거고요.
작가님 말씀처럼 이런 게 바로 인생 아닌가 싶어요. 무심하고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여기저기 치이고 깨지기 십상이지만, 결국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특별한 순간’은 분명 존재한다는 거.
남들뿐만 아니라 나 또한 알아채지 못할 만큼의 성장 또한 값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영화를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영화를 추천해주신 작가님, 정말 감사합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제 앞으로의 이야기 엔딩까지 꿋꿋이 써 내려 가볼게요!
PS. 저에게 있어서 특별했던 순간을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한동안 방황을 일삼았던 저는 평소 영화를 즐겨보던 성향 덕분에 여러 영화를 접해볼 수 있는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현재는 일을 그만둔 상황이지만 다시 영화와 관련된 일을 알아보는 중이랍니다.
근데 때마침 작가님께 메일이 온 거예요! 제가 몇 년 전 보냈던 사연이 책에 실려 나올 거라는 소식과 함께! 별일 아닐 수 있지만 참 드라마틱하지 않나요? 그때나 지금이나 전 똑같은 취준생인데 상황은 꽤 많이 달라졌다는 게. 이런 순간을 돌이켜보면 살아가는 것도 꽤나 재미있어요.
제 인생에 자그마한 이벤트를 만들어주신 작가님께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아무쪼록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시는 모든 분들이 이 책과 영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바라며,
—H
Cookie 우리는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걸까요? | 요노스케 이야기 & 스탠 바이 미 —D의 답장
안녕하세요. 2년 전 편지를 보낸 D입니다.
몇 번의 계절을 돌아 잊고 있던 편지의 답장을 받는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반갑고 기분 좋은 일이었어요. 그러는 동안 스무 살이었던 저는 스물두 살이 되었고, 제 곁엔 저를 만나 다행이라고 말해주는 사랑하는 사람도 생겼답니다.
돌이켜보면 편지를 보낼 당시 스무 살이었던 저는 나름대로 절박한 심정이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든 삶의 진실을 알아내고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었죠. 죽음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사랑하는 것들과의 이별이 예정된 게 그 당시 제가 해석한 삶인데, 다들 어떻게 그리 태연한 얼굴로 살아갈 수 있는 건지 나를 뺀 모두가 대단하고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나날이었어요.
다행히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제 나름의 대답 비스름한 것도 찾았고 그것에 기대어 멀리서 보면 그럴듯하게 살아가고 있었는데요. 무료해지던 찰나에 먼 곳에서 날아온 사려 깊은 답장은 단조롭게만 느껴지던 제 일상을 다시금 소중히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어요. 돌아보면 제게 일어났던 크고 작은 모든 일은 영화 속 한 컷들이 그렇듯 미약하게나마 저라는 사람을 구축하는 데 꼭 필요한 거였어요. 이제는 ‘우리는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걸까요?’라는 제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라고요. 우리의 욕망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있다고요.
<벌새>의 영지 선생님이 남긴 편지 속 한 줄처럼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지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몰라져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도 찾아오지만, 마음에 흙탕물이 인 것처럼 두려워질 때면 이 책을 꺼내볼게요. 저와 닮은 이름 모를 이들의 고민과 그에 따른 다정한 처방이 가득 담긴 이 책을 머리맡에 두고 자면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책이 세상에 나왔네요. 독자로서 기쁩니다. 작가님도, 이 답장을 읽고 계신 모든 분도 부디 잘 지내시길 바라요. 각자 삶의 단일한 주인공이 되어, 자기 앞에 놓일 모든 일을 충분히 음미하실 수 있길 바라요. 저도 그럴게요.
—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