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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묘 사실 이번 저희 책 <사적인 계절>은 그동안 작가님이 작업해 온 그림 위주의 책들과는 다르게 에세이 비중이 굉장히 높잖아요. 에세이 화집 출간을 마음먹게 된 계기랑 글 작업을 어떻게 하셨는지도 궁금해요.
혜미 한 번씩 이상한 용기가 생겨가지고.
소묘 이상한 용기 너무 좋다.
혜미 글을 잘 쓴다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소묘랑 <빛이 사라지기 전에>(2021) 내고 나서 에필로그에 작가의 말도 좋았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해주셨어요. 노석미 작가님 산문집 <서른 살의 집>(마음산책, 2011)이나 <매우 초록>(난다, 2019)을 읽고, 언젠가 그런 책을 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고. 소묘에서 에세이 화집 제안 주셨을 때 이 기회가 마지막일지 모르는데 사람들이 준 용기를 덥석 잡아보자 싶었죠. 그렇게 무작정 잡았는데. 진짜 후회를 많이 했죠. 너… 제정신이야?
소묘 왜요. 이렇게 잘 쓰셔놓고. 물론 저희가 이 책 계약을 2021년 겨울에 하긴 했어. 원고도 원래는 2023년에 들어왔어야 해.
혜미 그러니까 그게 그림이 아니라 다 글 때문에. 마음먹고 쓰기 시작한 건 2년 전인데 그때 동료 그림 작가들이랑 같이 남지은 시인님한테 글쓰기 수업을 듣게 됐어요. 저는 시인님이 내주시는 주제랑 안 맞게 우리 책 주제로… 계절 글을 1년 동안 써서 보여드렸고 피드백 받고 한 게 이 책에 실렸죠. 책 받자마자 그날 저녁에 바로 시인님한테 전해드렸는데, 돌아오는 길에 울컥하더라고요.
소묘 오늘 같이 모셨어야 했네요. 감사하다. 책 펴낸 소감도 여느 때랑 다를 것 같아요. 연휴 동안 리뷰가 제법 올라왔는데 혹시 기억 나는 후기 있으세요?
혜미 사실 좀 어벙벙했어요. 이렇게 긴 리뷰를 전에 본 적이 없어서. 그동안 냈던 그림책이나 독립출판물 후기랑은 정말 다르더라고요. 처음 리뷰 올라왔을 때 깜짝 놀랐고 계속 깜짝깜짝 놀라고 있어요. 에세이 리뷰는 이렇게 길구나, 다들 글을 잘 쓰시는구나. 저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깊게 읽어주시고 진심이 전해지니까, 감사하다, 너무 감사하다. 그리고 저를 오래 봐오신 분들의 리뷰도 있지만 소묘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이 봐주셨구나 알겠더라고요. 서로에게 참 좋은 일이었다, 이런 생각도 들고.
소묘 저는 이번 겨우내 작가님 그림 안에서 사는 기분이었어요. 우리 책 겨울 장면이 다 눈이잖아요. 사실 책 작업 시작할 때만 해도 이 그림들이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는데, 첫눈부터 폭설이더니 눈이 많이 자주 왔어요. 내 눈앞에 펼쳐진 게 다 그림 같고 믿기지가 않고, 내가 이 계절을 혜미 작가님 그림으로 통과하고 있구나. 잊지 못할 겨울이겠다. 작가님에게 특별한 계절은 언제예요?
혜미 봄이요. 추웠다가 따뜻해질 때 그 기분 그 냄새 그런 게 좋아요. 싹이 움트고 꽃이 만개하는 것도.
소묘 책에도 쓰셨는데, 원래 이름이 향기였다고.
혜미 네, 봄에 태어나서. 엄마는 아직도 향기라고 불러요. 그래서 그런가, 봄이면 좋은 기분이 돼요.
그런데 그림은 여름 장면을 더 많이 그리게 되더라고요. 여름을 좋아하진 않지만 기억들은 여름에 더 선명하게 남아서인 것 같아요.
소묘 그러고 보니 저희 <빛사전>도 여름이고.
선정 저도 계절로서의 여름은 안 좋아했는데, 책에서 여름 장면들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특히 선풍기 틀고 누워서 책 보는 장면.
소묘 아, 너무 좋죠. 그 옆에 조각 그림들도. 수박이랑 포도랑 모기향이랑.
혜미 그 조각 그림은 저도 그리면서 어, 왜 이렇게 잘 나오지… 했어요. 큰 그림이 잘 나왔어야 했는데. 후후.
소묘 작가님 작업 영상 보면 한 땀 한 땀 점점이 세밀하고 섬세하게 작업하시잖아요. 감탄과 동시에 걱정도 들어요. 연필로 스케치하고 그 단종됐다는 펜으로 먹선 그리고 그 위에 색연필이랑 물감으로 채색하시는데, 한 장면 완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걸까. 이번 책은 일 년 내내 작업하셨죠.
혜미 네, 이 책은 한 컷 한 컷 완성하기보다는, 섬네일이랑 더미북을 만들어놓고 모든 장면을 우선 스케치한 후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식으로 작업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보통 표지 한 장 하는 데는 한 달이 걸려요. 운동 같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건강하게 작업할 때 한 달인데, 이 책 작업할 때는 아무것도 못 했죠. 산책도 안 하고 밤도 매일 새고.
선정 저희가 작업할 때 자주 통화하는 편인데, 그림 마감 앞두셨을 때 한 달은 연락을 못 드리겠더라고요. 마지막 통화 때 서로 웃다가 끊었죠.
혜미 웃음이 계속 나.
소묘 체념… 실성… 흐흐. 우리 이 책 마감한 게 기적이었어. 근데 잘 나왔죠.
(*뒤늦게 지원사업에 선정된 바람에(?) 지원사업 마감일에 맞추느라 모두의 한 달이 송두리째 사라진….)
책 작업하는 동안은 역설적으로 계절을 느낄 새가 없으셨을 텐데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계절의 순간이 있으실까요?
혜미 바깥에서 느끼는 계절도 있지만 집 안에서도 계절의 변화를 알아챌 수 있어요. 우선 햇빛의 각도가 달라지잖아요.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이 달라지고, 창문을 열어놓는 시간도 달라지고, 그때 들어오는 바람도 달라지고, 그래서 식물이 놓여지는 자리가 바뀌고.
소묘 슬프지만 다행이다.
혜미 작업하면서 밤을 새는데 5시에 들어오던 빛이 이제 6시에 들어와 점점 슬퍼지는 거. 그러다 7시에 들어오면 정말로 계절이 바뀌었구나 알게 되는 거. 저는 사실 그게 좋아요. 모를 수도 있는데 그걸 내가 알아채고 있다는 게. 원래 그랬던 건 아니고 이 책 작업하면서 더 생각하게 됐어요. 일출 시간이나 일몰 시간도 확인하게 되고, 해가 이만큼이나 길어지는구나 이만큼이나 빨리 지는구나. 겨울 글에도 썼는데 어느 날은 일몰이 4시 35분에 시작돼요. 그전엔 겨울에 해가 그렇게 빨리 지는지 몰랐어요.
소묘 2019년의 사적인 계절과 2025년의 사적인 계절 사이에 달라진 점이기도 할까요?
혜미 네, 애정인 것 같아요.
소묘 2019년의 <사적인 계절>엔 에필로그에 이렇게 쓰셨거든요. “어릴 땐 사계절이 있는 게 싫었다. 적응할만하면 계절이 바뀌었고 나는 늘 계절을 쫓아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혜미 맞아요. 맞아요. 많이 바뀌었어. 예전엔 계절이 그냥 배경이었던 것 같아요. 어딜 지나갈 때 보이는 건물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계절을 기억하는 감각도 뭉뚱했죠. 그사이 시간도 흐르고 나이도 먹고, 그러면서 관계에 대한 생각도 바뀌고 만나는 사람들과 더 깊어지고,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만큼 달라졌어요. 이 책 작업하면서는 뭐랄까, 빵 굽는 것처럼 제 마음이 이스트처럼 부풀어 올랐달까. 예를 들면, 옛날엔 그냥 덥다 하고 끝났을 텐데 더울 때 뭘 하면 좋을까 생각하기도 하고, 맞아 그때 그 애랑 그랬을 때 좋았는데 떠오르기도 하고, 이런 게 켜켜이 쌓이면서 페이스트리처럼. 잘 익어간 것 같아요. 이게 다 뭘까, 짚어보면 결국 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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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월의 한파가 닥친 날 한 시에 만나 일곱 시에 헤어졌다. 장장 여섯 시간에 걸쳐 먹고 마시고 이야기 나누며 온기를 가득 나눴다. 가만히 앉아 긴 산책을 한 기분. 소소한 이야기들을 빼고도 녹취를 풀었더니 A4 70장이 나왔는데 그걸 사흘 꼬박 들여 다섯 장으로 줄였다. 어쩌면 누락된 65장이, 아니 어쩌면 70장 밖의 이야기가 더 중요했을지 모른다. 고양이와 댕댕이, 임보와 입양, 철새와 탐조와 감탄, 맛집과 여행과 좋아하는 장소, 커피와 디저트,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소중히 여기는 단어, 친구와 동료와 자매들, 책 속 장면마다 얽힌 에피소드, 빠질 수 없는 MBTI(혜미 작가님과 소묘는 같고 선정 실장님은 정반대…), 절망과 희망의 다채로운 순간들, 그리고 이놈의 시국 시국 시국- 분노와 희망을 번갈아 저글링하며. 그럼에도 우리는 아름다움을 놓고 싶지 않아서 기어이 서로가 내어준 온기를 잡고, 용기를 내고, 용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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