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내일을 이루는 이로운 무늬
‘지금의 나를 만든’이라니, 어쩐지 거창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읽고 만든 모든 책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왔을 테다. 그 어떤 비유도 아닌 투명한 사실로, 내가 만든 책들이 다시 나를 만든다. 그리고 ‘만들다’라는 단어는 필연적으로 변화의 속성을 지닌다.
지금의 나는 변화 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불과 5년∼6년 전만 하더라도 삶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르는 과도기를 통과하고 있었고, 그때 무루 작가의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이하 『이로운 할머니』) 를 만들었다. 출판사 ‘오후의 소묘’의 시작에 이 책이 있다는 것을 그간 여기저기에서 (<기획회의> 529호에서도!) 밝혀온 터라 이 이야기를 또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오롯이 이 책만을 다룬 적은 없었기에 오래 담아둔 편집자 후기를 뒤늦게나마 풀어본다.
2017년의 겨울이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 나는 가방에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읽기’라는 가제가 붙은 책의 출판계약서를 넣고서 무루 작가와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만났다. 이것은 우리의 세 번째 만남으로, 첫 만남은 그의 그림책 수업에서였다. 나는 그를 조용히 오래 좋아해 왔다. 단정한 글과 사진으로 꾸려가는 블로그를 탐독했고 그가 2012년에 홍차에 관해 쓴 첫 책의 독자였으며, 어느 날 그가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읽기’ 모임을 꾸린다는 공지를 올렸을 때는 가슴이 뛰었다.
하루 수업을 듣고는 단번에 그의 조용한 독자에서 열렬한 편집자로 변신해, 바로 전 직장인 어크로스 출판사에 출간을 타진했다(당시 나는 프리랜서 편집자이자 고양이책방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친구와 내가 운영하던 책방으로 무루 작가가 찾아와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을 때 이 모종의 기획을 그에게 전한 후, 마침내 세 번째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2017년 12월 26일 남서울미술관, 그곳에선 루이즈 부르주아의 그림책 전시 <망각에 부치는 노래 (Ode l’Oubli)>가 열리고 있었고, 이 전시에 관한 이야기는 훗날 『이로운 할머니』의 서문이 된다.
“아흔 살의 할머니가 그림책을 만든다. (중략) 루이즈 부르주아의 그림책은 한 여인이 어른으로 살아온 긴 시간의 흔적들을 재료 삼아 만들어졌다. 해진 천을 자르고 꿰매며 작가는 자신의 지난날들을 오래 매만졌을 것이다. 전시장 벽면에 걸린 그림책을 보고 난 뒤로 나는 바느질하는 할머니의 손을 자주 상상했다. 그 손은 오래된 것들을 쉽게 버리지 않는 손이고, 때로는 그것들을 모두 꺼내 과감히 자르는 손이며, 끝내는 섬세하고 다정하게 깁고 이어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낼 줄 아는 손이다.” (무루,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서문 중에서)
『이로운 할머니』는 루이즈 부르주아의 그림책이 그렇듯, 무루 작가가 자신이 오래 매만져 온 이야기를 천 삼고 아끼는 그림책들을 실 삼아 섬세하고 다정하게 깁고 이어 만들어졌다.
(중략)
그와 함께 그림책들을 읽고 그의 글을 매만지며 나는 비로소 내가 나이 들어 무사히 도착할 어떤 미래를 그려보게 됐다. 앞날에 대한 계획도 희망도 없이 현재마저 비관하며 살던 나 자신이 이제는 까마득하다. 쇠락해 가는 내일이 아니라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삶을 완성해 가는 모습을, 이제는 조금 설레며 기다린다. 이 책에 스미어 전에 없던 하나의 문장이 내 안에 생겨난 것이다. ‘할머니가 되고 싶다.’ 이것이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놓인 가장 큰 변화다.
그 책을 만드는 사이 ‘오후의 소묘’가 태어난 것은 그보다 작은 변화다. 지금의 나는 내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필요한 재료들을 만들고 있다. 우리 그림책들은 모두 내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그리고 할머니가 되어서도 몇 번이고 펼쳐보고 싶은 그림과 이야기가 담겼다. 오후의 소묘의 출간 기준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데 이렇듯 몹시 명확하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계속해서 펼쳐볼 그림책. 한편 오후의 소묘의 에세이들은 할머니가 될 미래를 위한 징검다리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내일을 향해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길을 만드는 일, 혹은 나를 새로이 이끌어 줄 곳으로 발을 딛게 해주는 것.
그 걸음걸음에 여전히 무루 작가가 있다. 우리는 번역 그림책 작업, 여성 창작자 독서 모임, 일상생활기술워크숍 등 이것저것을 도모하며 나란히 삶의 방향을 같이하고 있다. 실은 내가 그의 뒤를 좇아가고 있는 것이겠지만. 지금 나는 『이로운 할머니』 계약서를 쓰던 때, 자신은 한창 자라는 중이라던 무루 작가의 나이가 됐다. 이제 변화라고는 없을 것만 같은 나도 어쩌면 자라는 중일까. 무루 작가는 자신이 바라는 미래의 편으로 갈 때 그림책으로부터 힌트를 길어 올리고 나는 그런 그의 삶과 글에 기댄다.
실은 지금도 그의 글 속을 살아가고 있다. 2025년 상반기에 책으로 선보이게 될 것이다. 장장 5년 만의 신작이라니. 여전히 잊지 않고 기다려 준 독자가 있으리라 믿는다.
가제는 ‘우리가 모르는 낙원: 무루의 이로운 그림책 읽기’이고 하 수상한 시절을 겪고 있는 이때에, 우리가 만드는 두 번째 책이 우리도 모르는 낙원의 힌트가 되어준다 면 좋겠다. 그의 책이 내게 그랬듯, 누군가의 내일을 이루는 이로운 무늬가 되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