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부터 5회째(!)에 접어든 ‘올해의 그림책’입니다. 오후의 소묘는 올해 모니카 바렌고가 그리고 다비드 칼리가 글을 쓴 <여전히 나는> 한 권을 선보였는데요. 물론 제 마음속 부동의 1위지요. 처음 본 순간 반했고 작업하면서도 내내 눈물 그칠 새 없었어요. 이제는 마지막 페이지들의 할아버지와 댕댕이처럼 조금 미소 지을 수 있게 되었답니다. :)
올해는 유독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이 쏟아져 나온 해였는데요. 우리 레터 구독자 분들과 함께 읽고 싶은 그림책들 추리고 추려 소개합니다.(책 제목 기준 가나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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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만나러> 최산호 최산호 작가님은 안희연 시인님의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의 표지로 알게 되었어요. 바로 떠오르는 분들도 계시겠죠? :) 그 표지의 그림이 이 그림책 속 한 장면으로 등장한답니다. 작가는 숨기고 싶은 나라는 존재가 바깥으로 나가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소개하고 있어요. 하지만 글 없는 그림책이라 책을 만나는 사람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써볼 수 있을 테고요. 노란 털의 호랑이가 점점 분홍으로 물들어가는 동안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리실지 궁금해요. 오른편(우수)에는 채색 그림이 왼편(좌수)에는 작은 스케치가 있는데 채색 그림은 밀도 높게 아름답고 스케치는 약간의 유머와 귀여움이 묻어 있어 보는 재미도 크답니다.
<눈 극장> 아라이 료지 / 피카주니어 아라이 료지의 그림은 아름다운 색채와 자유로운 질감으로 언제나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고, 이야기에는 얼마간의 슬픔이 묻어 있습니다. <눈 극장>은 그 결정판이 아닐까 싶어요. 슬픔으로 파묻힌 흰 눈 속에서 환상적인 무대가 펼쳐지거든요. 눈이 세상을 덮을 때마다 <눈의 시>와 함께 펼쳐보게 될 책이 되겠어요.
<돌돌돌> 임연재 / 창비 아기 그림책이에요. 응? 아기 그림책이라니! 선물받아 읽게 되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ㅠㅠㅠㅠ 다치고 아파본 뒤에 주변의 아픔까지 알아보고 돌돌돌 감싸주는 마음을 가지게 돼요. 그림 정말 지나치게 귀엽고 재치 있고, 뒤표지 글 그대로인 책. “나와 친구를 보듬는 주문 ‘돌돌돌 돌돌돌’ 상처와 슬픔을 따뜻하게 안아 주어요.” 덮고 나면 “다 나았다!”외치게 될 걸요.
<룬드와 큘란> 에바 린드스트룀, 이유진 옮김 / 단추 에바 린드스트룀의 그림책이 아니었다면 이런 제목에 이런 그림(배 나온 아저씨가 그려진)의 책을 사 봤을까 싶어요. 하지만 린드스트룀이니까, 단추 출판사니까, 믿고 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사랑이 되지요. 우주로켓을 만들고 달을 따 오는 끈금없는(=갑작스럽고 엉뚱한) 전개에 이게 뭐야?를 연발하다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고, 그게 마지막 페이지라는 게 믿기지 않아서 자꾸 책을 열었다 닫았다 했습니다. 린드스트룀이 곳곳에 숨겨 놓은(혹은 대놓고 하는) 유머들에 많이 웃었는데 금세 씁쓸함과 슬픔이 뒤따랐고 그러나 남는 건 아무려나 사랑이네요.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가> 김개미 글, 이수연 그림 / 문학동네 그날 많은 사람들이 잠 못 이뤘던 계엄의 밤에, 이 그림책의 서문과 장면들이 불현듯 떠올랐어요. “지난밤 꿈에 본 탱크의 행렬 / 포신이 빙글 돌아 나를 겨누는 상상 /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 빈손을 내려다보며” 책을 읽을 때는 먼 나라의 일로 여기며 조금 거리를 두고 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살던 곳을 떠나 바다로 향하는 사람들을, 끝내 도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기억하겠다고 작게 다짐했을 거예요. 하지만 나의,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기억해야 해 / 가슴속에 사라지지 않은 구멍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 (…) 바다에 도착하면 모든 길이 숨어 버리지만 / 어떤 길은 거기서 시작돼”
글은 김개미 시인의 시입니다. 시를 그림책으로 시를 그림책으로 완성도 있게 만드는 건 쉽지만은 않은 일인데요. 이수연 작가는 그것을 놀랍게 해냈어요. 이 문장이 저를 파고들고 제게 각인되고 자꾸만 떠오르는 건 이수연 작가의 그림 덕분입니다.
<숲속의 먼지> 이진희 / 웅진주니어 이진희 작가의 그림은 섬세하면서도 포근해요. 책에 추천사를 쓴 무루 작가는 이진희 작가를 이렇게 소개해요. “세상에서 가장 얇고 보드라운 실로 겨울 이불을 짓는 사람이다.” 어쩌면 이렇게 쓰시는지…! <도토리의 시간>으로 좋아하시는 분들 많을 텐데요, <도토리의 시간> 이후 4-5년 만의 신작이라 저도 오래 기다린 마음에 아주 반갑게 이 책을 만났답니다. 책을 덮고는, 더 넓은 세상으로의 모험을 포기한 먼지에게 모종의 아쉬움을 느끼며 자리로 돌아와 앉았는데요. 일을 하려다 돌연 눈앞이 이 책의 풍경처럼 포슬해지며 눈물이 쏟아져 당황했어요. 먼지가 모험보다 소중하게 여긴 아기 고양이, 그리고 아기 고양이와 함께하는 일상, “그걸로 충분했어요.” 그건 내 목소리이기도 했습니다.
<오로지 나만> 사라 룬드베리, 김아영 옮김 / 봄볕 “엄마, 그거 알아요? 엄마는 부두고, 나는 배예요. 그리고 배는 부두에 단단히 묶여 있어요.” 이토록 강렬하게 시작하는 이야기라니. 하지만 소년은 자기 힘으로 매듭을 풀고서 세상을 한 바퀴 돌며 환상적인 모험을 합니다. 소년은 다시 엄마에게 돌아오지만 손에는 새로운 씨앗이 들려 있어요. 사라 룬드베리 그림은 색감이 강렬하면서도 톤 다운된 색채와 면에 슬픔과 우울이 깃들어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마음을 울립니다. <사랑을 연습한 시간>을 작업하며 곁에 둔 이야기예요.
<점과 선과 새> 조오 / 창비 초기작부터 새를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아온 작가가 새 자체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영역을 넓히며 버드스트라이크(조류충돌)에 대한 오랜 탐구와 실천으로 만들어낸 슬프고도 아름다운 그림책이에요. 희망과 환희로 가득했던 장면들 끝에 현실을 직면하는 엔딩이 몹시 괴롭기도 했지만,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려낸 작가의 마음은, 손끝은 얼마나 용기 있는지요. 이 책을 만난 시점도 저에겐 더 각별했습니다. 책을 만나기 직전 멧비둘기가 방음유리벽에 충돌하는 장면을 목격했거든요. 부상을 입어 날지 못한 채 비틀거리는 멧비둘기를 보호하고 야생동물구조센터로 인계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책처럼 투명한 유리벽들이 점점이 다채로워지기를.
<호두와 사람> 조원희 / 사계절 “이 책은 호두가 저에게 오기까지 약 1년 4개월간의 기록입니다.” 작가 소개글에 적힌 문장 그대로 한 권의 보고서 같은 이 이야기는 어떤 은유도 장식도 없이 담담히 사실을 서술해 가는 단문과 여백 가득히 작게 그려진 펜드로잉 그림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에게 상처 입었을 것이 분명한 호두, 그리고 호두를 지키려는 사람과 또 사람들. 사람을 향한 절망이 깊어질 때 사람의 손길이 따스할 수 있다는 걸 이 책으로 기억하려 합니다. 호두야, 행복해!
<흰, 눈이 그치면 WHITE> 스테판 키엘, 김자연 옮김 / 도도 어쩌다 책 소개 배치가 이렇게 됐는지, 도심 속 조류충돌과 인간에게 상처 입은 개의 이야기에 이어 이번엔 기후위기 시대에 망가져 가는 자연을, 생태계를 이야기하는 책이에요. 순백의 압도적인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 사이 깊은 먹의 숲도 헤쳐야 하지요. 이 세계에서 사람은 한낱 나뭇가지만큼 작고 그림자와 발자국만큼 희미합니다.
* 그 밖에 함께 읽고 싶은 그림책들
─ 아라이 료지와 사라 룬드베리의 고양이 그림책: <고양이의 꿈> 아라이 료지, 엄혜숙 옮김 / 창비 <고양이 산책> 사라 룬드베리, 이유진 옮김 / 작가정신
─ 소묘 작가님들의 그림책:
<마음은 어디에> 김선진 그림, 이수영 글 <열 개의 인형> 휘리 그림, 이상교 글 <이불개> 이미나 |